나의 친구는 고향에 있었다
2006-06-20 (화) 12:00:00
미국에 온지 20년이 다가온다. 그 때 8년 전에 취업이민으로 미국에 온 처제네 친지 초청으로 미국에 온 것이다. 55년의 인생고개를 넘나드는 농촌의 삶이 힘겨워서, 그간 10여 차례 고국에 오고 가면서 습관처럼 이어지는 행사가 있다. 고국에 가는 일정이 정해지면 고향 여주에 사는 친구 손종학 씨에게 전화를 해서 고향에 나가는 대로 소학교 친구들과 가까운 충수 웅골 온천탕에 가서 온천 목욕을 즐기고 때를 따라 유명세가 있는 식당을 찾아가서 푸짐한 점심을 함께 하는 일이 한국 생활의 시작이기도 하다.
한 반에 70명 정도의 학생 중에는 반에서 제일 어린 축에 드는 우리들보다 6세가 더하고 한 두 명은 이미 장가도 든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 손종학 씨는 소학교 6년간 한 책상에서 정겹게 공부한 친구이기도 하여 그 정분을 회고하며 종종 전화로 안부도 묻곤 한다. 여름 장마 때 개울물이 넘칠 때는 6-7세 연하의 나를 등에 업어 건너다 주는 동급생도 있었기에 소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친구라는 감정보다 문중의 형님을 뵙는 감회가 있는 분도 있다.
지금은 모두를 70여세의 노인층으로 고향을 지키고 농촌의 유업을 이어가는 늙은 친구들이 존경스럽다. 농업인이라는 자부심과 긍지가 있다. 농업이 사람을 먹고살게 하고 있지 않은가.
이 곳에 오기 전 다수확을 위한 농업 경영인으로서 한국 농업기술자협회 총재로 계시던 유달영 박사를 주축으로 하여 여름에는 농축업을, 겨울에는 건국대학교 시설을 빌려 전국의 농업인들이 모여 공부하고 연구 발표하여 새로운 시설원예와 더불어 풍성한 식탁을 제공하는 일이 농업인들의 땀의 결정이요, 오늘날의 풍성하고 늠름하게 한 자화상이 아닌가 위대한 농업인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농업의 해악을 지양하려는 FTA 원정팀에게도.
친구! 미국 생활 중에 이곳에 와서 만난 이들과 혹 이웃하여 살지라도 동족애는 말할 수 있어도 친구나 동무로서의 인간애를 느끼고 교류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혈족이라는 동질성이, 베태하지 않은 인간 습성이 한민족의 의식 내부에 깊이 잠재한 이유일까? 아니면 나의 탓일까 를 새겨보는 게다.
고국에 갈 때마다 고향 친구들의 정분에 잠기면서 때론 먼저 가신 친구 고인의 묘소를 찾아가보는 일도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 내가 먼저 타계한다면 어느 친구가 내 묻힌 묘소를 찾을 것인가를.
뒷 잔디밭에 각종 새들, 토끼, 다람쥐들이 어울리고 있다. 때로 던져준 모이를 먹기 위해 그들도 그들만의 합중국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 친구들의 우정에 잠겨본다.
고대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