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구마 순

2006-03-12 (일)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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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는삶

▶ 한현숙/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여보, 이것 좀 봐.”
감동이 가득 찬 얼굴로 남편이 나에게 가져 왔다. 부엌 청소 하다가 고구마의 순을 발견한 것이다. 어쩌면…! 둘 다 할 말을 잃고 고구마를 바라보며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아주 조그만, 내 새끼손가락 손톱 보다 더 작은 녹색 잎이 똑 같이 가냘픈 가지 끝에서 꽃처럼 피어 있었다. 짙은 자주 빛 줄을 친 연한 잎은 마치 신생아실에서 금방 나온 갓난아기의 실핏줄을 보는 듯하였다. 경이로웠다. 새 생명이었다.
아무렇게나 대바구니에 담아 부엌 한 쪽 어둔 곳에 겨울 동안 무심히 두었던 고구마였다. 봄이라고… 이것도 생명을 가졌다고… 나의 가슴이 조용히 뛰었다.
문득 지난 작문반의 Ruth의 시가 생각났다. 시 마지막에 그녀는 “old paths peter out, making room for the new.”라고 썼다. 그 마지막 부분에 대하여 내가 느낀 것을 발표할 때, 맞은편에 앉아 나를 바라보는 중년이 지난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내 인생의 반이 꿈결같이 지났다. 아이들은 어느새 자라 각자의 길로 힘차게 떠났다. 나는 남편과 함께 두 아들에게 건강함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따뜻한 가슴과, 또 자신과 사회에 대하여 정직하고 바른 마음을 지닌 젊은이로 자라도록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사랑과 보조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 갔다.
우리 부부는 한 해씩 더 나이가 들 것이고, 언젠가는 메마르고 기운 없는 늙은이가 될 것이다. 새 순을 세상에 내 보낸 저 마른 고구마 같이.
안간힘을 다해 어둠 속에 숨어서 새 순을 내 보낸 고구마가 장하게 보였다. 어린 생명이 하나씩 온 힘을 다해 고구마의 몸을 밀고 나올 때마다, 고구마는 조금씩 속으로 마르고 있었으리라. 저렇게 사랑스러운 어린 잎을 세상에 내 보내기 위하여. 그리고 아무런 미련 없이 껍질만 남기리라.
인생의 마지막에 나는 행복한 엄마로 눈을 감을 것이다. 아들들이 나에게 준 셀 수 없이 많은 기쁨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서. 마치 무엇을 잡을 듯이 세상을 향해 가지를 뻗어 나가는 고구마의 어린 순을 바라보며, 삶의 한 가지 변함없는 진실을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희생이다. 어떠한 목표를 두고 그 누군가가 스스로 희생할 때 일어났던 역사상의 크고 작은 변화를 우리는 늘 경이로운 마음으로 지켜보지 않았던가. 아, 나는 이 사순절에 희생과 새 생명을 보았다. 기쁘다.
한현숙/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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