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걷기 예찬

2006-02-26 (일)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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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칼럼

▶ 문무일 신뢰회복연합조직위원회 위원장

땅위를 걸어가는 것은 세상을 향한 자기개방이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와 정대면 하는 것이다. 니체는 환희의 지혜(gai savoir)의 한 아포리즘에서 말했다. “나는 손만 가지고 쓰는 것이 아니다. 내 발도 항상 한몫을 하고싶어한다. 때로는 들판을 가로질러서, 때로는 종이 위에서 발은 자유롭고 견실한 그의 역할을 담당해준다.”
그는 ‘차라투스트라’에서도 이렇게 적었다. “심오한 영감의 상태, 그 모든 것이 오랫동안 걷는 길 위에서 떠올랐다”고.
키에르케고르는 1847년 제테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는 걸으면서 나의 가장 풍요로운 생각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걸으면서 쫓아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이란 하나도 없으니까요…” 걷기는 원초적이고 원소적인 것과의 접촉이다. 공간 속으로 침잠하는 동안 시간의 길이에 대한 일체의 감각이 사라져버린다.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 거처를 정한 때문이다. 걷는 이는 자기시간의 하나뿐인 주인인 까닭에 그는 시간부자다. 자신의 원소 속에 몸을 담그고 있듯이 자신의 시간 속에 몸담고 유영한다. 걷는 사람은 낭패감속에서도 자신의 삶과 계속 한 몸을 이루고, 사물들과 육체적 접촉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행복하다. 태연하고 고요한 경지에서 자기통제의 일정한 경지에 이르면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털어버린다.
활짝 열린 그 공간이 의미의 길이 되고 진리의 길이 될 수도 있다. 깊은 사색에 잠기는 여유로 인하여 때로는 잊었던 기억을 다시 찾는 기회가 되고 추억과의 만남도 이루어진다. 걷는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나 무엇을 보고해야할 의무가 없는 자유인이다. 그야말로 기회와 가능성의 인간이요, 길을 따라가며 수많은 발견을 축적하는 변화무쌍한 상황의 나그네가 된다.
인간에게 있어 자유는 내재적 속성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멈추거나 계속하거나 이쪽으로 가거나 저쪽으로 가거나 할 수 있어야한다. 자연과 하나가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걷는 것은 혼자인 게 좋다. 걸어가면서 얻는 심오하고 신비한 무엇을 동반자로 인해 잃어버릴 수도 있다.
혼자 걸어갈 때 자신의 존재를 쉽게 느낀다거나 혼자일 때 생각이 맑아지는 건 침묵이 한몫을 해준 때문이다. 침묵이란 감각의 한 양식이며 개인을 사로잡는 어떤 감정이다. 걸어가는 동안 귀에 들리지 않는 침묵을 바라보며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장자가 말하는 ‘청무성’의 경지에 이를 만도 하다.
삶이란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이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모든 것과 다 손잡을 수 있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불구불한 길을 그리고 자기자신의 내면의 길을 더듬어 가는 것, 그 길이 곧 철학의 길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심각한 위기, 의미의 위기, 가치의 위기를 통과하고 있다. 결국 주체의 위기를 통과하고 있는 셈이다. 옛날 당나라 혜조선사가 땅위를 걷는 것은 기적으로 비유했다. 걷기 예찬은 삶의 예찬이요, 생명의 예찬인 동시에 깊은 인식의 예찬이기도 하다.
문무일 신뢰회복연합조직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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