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생해서 길러 놓았더니…

2006-01-08 (일)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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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론 마당

▶ 박용하/VA


일주일에 몇번씩 서로 먼저 안부를 주고받는 친구의 전화 목소리가 우울했다. 원인을 물으니 “이제 친정 식구들 모이는데 가기가 싫다”고 했다.
그는 참으로 총명하고 지혜롭게 삶을 사는 여성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지시자 전교에서 1-2등을 하는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 졸업 후 바로 취직할 수 있는 상업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졸업 때도 성적이 우수해서 전액 장학금 대학입학 추천이 있었지만 은행에 취직을 해 집안 생계를 꾸려 나갔다. 동생들 학비를 대느라 식권을 돈으로 바꾸고 탈의실에서 도시락을 혼자 먹기도 했다.
덕분에 머리 좋은 동생들은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했으며 결혼 또한 좋은 집안과 했다.
몇십년이 지난 지금 조기 퇴직을 한 후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작은 회사에 취직해 나가는데 얼마전 올케로부터 “돈 몇푼 번다고 이 추운 겨울에 동상에 걸려가며 직장에 다니느냐”는 핀잔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푸념을 했더니 동생이 “누나가 대학 못간 것이 누나 탓이지 누구 탓이냐”고 했고, 참다못해 손이 올라가게 되었단다. 옆에서 지켜보던 힘없는 어머니는 자식들의 다툼에 한숨만 쉬고 계셨다고 한다.
한 가정에서 가장이 쓰러지면 맏이로 태어난 형제가 생계를 꾸려가게 되고 밑의 동생들은 세상의 한파를 덜 느끼거나 모르고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먼 훗날 잘 살게 되었을 때 그것이 형이나 언니의 덕이었음을 종종 잊어버린다.
모두가 잘 살면 희생했던 당사자는 그것이 보람으로 남겠지만 사는 형편에 차이가 나거나 곤궁하게 되면 억울하기도 하고 야속도하고, 허무감까지 느끼게 된다. 잘 살 때는 친인척의 왕래가 잦지만 곤궁해지면 발길이 뜸해지고 때론 무시하며 냉정해지기도 하는 것이 세상인심이다.
이런때 세상 한파를 감쌌던 형제가 없었다면 얼마나 춥고 배가 고팠을까. 2006년 새해는 지나간 세월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를 돌봐준 고마운 이들을 기억함과 동시에 나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이들은 없는가를 살피는 것으로 시작해야겠다.
박용하/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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