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은퇴는 새 출발이다

2005-12-18 (일)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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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고]

▶ 윤학재/전 워싱턴 식품협회장

워싱턴 하늘 아래 늦깎이로 이민 와서 개미같이 열심히 살아온 이민 1세대의 한 사람이다. 새벽을 밤으로, 밤을 새벽으로 이어가며 이민생활 25시의 개척시대는 60년대, 70년대에 이민자들 우리 모두의 주어진 운명이요 시대적 사명이기도 했다.
찬바람이 무섭게 몰아치는 겨울, 모자를 눌러쓰고 플로리다 마켓에서 시작한 이민생활이었다. ‘철의 인간’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30년 세월을 살아온 동포사회의 봉사자요 뒤따라 들어오는 동포들의 이민 정착 길잡이로 수고해온 정세권 씨도 이제 은퇴라는 정거장에 섰다.
이민자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과 환경은 같을 것이다. 그 시간을 어떻게 쓰고 그 환경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다를 뿐이다. 재물을 많이 소유하는 성공도 있고 자녀를 잘 키우는 성공도 있고 동포사회와 민족을 위해 헌신적 봉사로 보람을 느끼는 성공도 있다.
이민자의 선구자였던 안창호 선생은 재물이 많아서 이민 역사에 기록된 사람이 아니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함으로써 민족을 깨우치고 국위를 선양한 지도자로 역사에 남는 것이다. 虎死留皮 人死留名 이라 했다.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 것은 호랑이의 길이다. 사람이 죽어 역사를 쓰고 이름을 남기는 것은 인간의 길이다. 우리 이민 개척자는 나 스스로가 민족의 얼굴이요 조국의 빛이다. 내가 스스로 이민 역사를 몸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나 하나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사람은…” “저 Korean은…”이라는 인종 평가 내지는 국가의 명예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격증 없는 외교관이 이민자의 생활이다.
여기 작은 씨앗으로 썩어 동포사회에 미력이나마 봉사한 사람이 세월의 흐름 속으로 간다. 미국을 상징하는 코카콜라 회사에서 23년간 아시아 마케팅으로 봉직하면서 동포사회에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워싱턴 한인회장을 역임하고도 동포사회 발전을 위해 백의종군하는 심정으로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도 봉사의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한인회장 경력은 이력서 쓰기 위한 출세의 자리가 아니다. 임기가 끝나고도 처음과 끝이 한결같이 계속해서 한인회장이라는 자세와 책임감으로 봉사하는 것이 동포들이 바라는 지도자 상이다. 이제 70년 달려온 정세권 자동차, 동포사회에서 동분서주한 30년의 세월로 리타이어 하는 날이 왔다. 친구들과 더불어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고 은퇴를 기념하는 축하의 술잔에는 술이 반이요 땀과 눈물이 반이다.
70이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새 타이어로 바꿔 낀 정세권 자동차는 내일도 힘차게 솟아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향해 새로운 각오로 경륜을 기름 삼아 힘차게 달릴 것이다. 그 차가 ‘뉴 70’이라는 새로운 번호판을 달고 워싱턴을 힘차게 달리길 기원한다.
윤학재/전 워싱턴 식품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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