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철인의 길

2005-10-18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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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삶

▶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쉐난도 계곡은 이 두 청년에게는 끝없이 험난했다. 10마일을 죽을힘을 다해 오른 산이지만 정상까지는 5마일을 남겨놓고 있었다. 빛 바랜 방향표시가 달린 갈림길에서 둘은 쓰러질 듯 주저앉았다. 햇살이 나무 사이를 뚫고 그 둘의 얼굴 위에 환하게 비추었다. 그 둘은 소리를 내고 웃고 있었다.
개구장이 철과 얌전한 현이는 단짝으로 유치원서부터 함께 다녔다. 철은 한없이 분주한 아이였다. 현이는 말수가 적고 침착한 아이여서 서로가 아주 대조적이었지만 항상 서로 장단점을 보완해가며 끝없는 우정을 지켜 나갔다.
둘 다 어려운 이민 가정에서 자라난 이들은 일찍부터 빈곤한 살림을 잘도 적응해 갔다. 추운 겨울에는 철이가 현의 북백 속에 장갑을 몰래 넣어 주고
현이는 철이의 북백 속에 털모자를 넣고 모른 채 했다. 학교에서 야외 학습을 가면 둘은 언제나 아프다고 조퇴해서 함께 도서관에 가서 견습지의 사정을 노트해서 다음날 선생님과 반 아이들을 놀라게 했다.
부모님에게 돈을 청한 적이 없는 이 아이들은 부끄럽지 않게 즐거운 학교 생활을 했다. 성적에 개의치 않고 무엇이든 재미있게 열심을 다했다. 과제가 주어지면 어른처럼 작품을 만들어 냈다. 철새에 대한 조사는 학교를 깜짝 놀라게까지 했다. 못 가에 가서 밤을 새며 억척스럽게 그 지역 철새의 동태와 이동을 가려낸 것이다.
둘은 깡통과 병을 주어와서 전교 학생운동으로 펼쳐 모인 돈으로 가난한 집 학생들에게 노트를 사주는 사업이 되게 했다.
철과 현의 부모님들은 일주일 내내 일하고 두 집 다 대식구를 거느린 터라
자녀들을 돌보지 못했지만 유독 이 두 애들은 토요일 한글 학교와 주일 학교에서 필요한 소양교육과 생활 지침을 참신하게 따라갔다.
철은 고교 졸업식에 학생회장으로, 현은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사를 했다. 이 둘은 똑같이 자기 인생을 길잡이 한 선생을 소개했는데, 어리둥절하게도 한글학교의 젊은 유학생 선생을 일으켜 세웠다. “박 선생을 소개합니다. 이 분은 물리학 대학원생입니다. 저희에게 삶을 정직하게, 기쁘게, 열심히 살도록 가르치신 분입니다.” 박 선생은 간신히 휠체어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앉았다. 박수가 우레같이 터져 나왔고, 현은 손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 철은 시카코에서 법대를 졸업하고, 현은 보스턴에서 외과 수련
의를 마치고 버지니아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들은 여전히 밤을 새며 일하시고, 한국에서 이민 온 식구들이 집에 넘쳤다. 예나 지금이나 덧자리를 깔고 방구석에서 잠을 잤다.
새벽같이 일어나 둘은 4년 동안 괴롭거나 즐거울 때 올랐던 쉐난도 계곡을
찾았다. 둘은 번쩍 일어났다. 다시금 정상을 향해서 오르는 것이다. 둘은 좀처럼 자기의 앞길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현의 주머니에는 국경 없는 의사회가 보낸 비행기표가, 철의 윗저고리에는 피스코가 인도네시아로 보내는 감사의 회답이 있었다.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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