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림자 소녀

2005-10-04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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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삶

▶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엘리자베스 호수는 동이 터 오는데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다. 새벽 안개가 살포시 수면을 덮고 있다. 어디선지 물새가 수면에 미끄러지듯 스쳐 간다. 쉐리는 아빠가 찬찬히 낚시 준비를 하는 동안 호수 곳곳을 살폈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언제나 그렇듯 호수는 새근새근 늦잠을 자고 있다. 잔잔한 호수가 눈을 뜨기 시작하면 으레 물고기들이 춤을 춘다. 수면에 작은 보조개를 그리며 산 듯이 물방울을 튀기기 시작한다. 아빠도 이때쯤이면 낚시를 드리운다. 쉐리는 들고 있던 접개의자를 아빠 뒤에 놓고 가져온 미술도구를 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매 일요일마다 이렇게 호수를 찾은 지도 벌써 몇 해가 된다. 쉐리는 말없는 아빠가 이른 새벽에 낚시를 챙기면 재빨리 따라나섰다. 아버지 동무가 되고 싶었다. 아빠의 안색은 점점 새까매 갔다. 엄마는 아빠가 중한 병을 앓고 있지만 잘 쉬시면 나으실 수 있다고 귀뜸을 해주었다. 그래도 쉐리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어느 날 고모가 캐나다에서 왔다. 아빠는 오랜만에 회색이 돌았다. 고모는 다짜고짜 “오빠는 지금도 옛날 생각에 헤어나질 못하는구려”라고 쏘아 붙였다. 아빠는 피식 웃으며 고모를 가볍게 껴안았다.
그날 밤 쉐리는 고모를 자기 침대로 모셔왔다. 불편하지만 한국말로 고모에게 “아빠가 무엇했어 한국서.” 고모는 쉐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쉬운 말로 아빠가 대학 재학 중에 나쁜 지도자에 맞서서 맨주먹으로 싸우다가 뼈가 부러지고, 칼로 찔리고 감옥에서 3년이나 갇혀있었다고 했다. 그 이후 저렇게 아프기 시작했고 고모가 캐나다로 불러 들였다고 했다.
아, 그랬구나. 쉐리는 아빠가 아직도 조국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었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다. 쉐리는 아빠가 좋아할 듯 싶은 한국에 관한 기사와 그림을 도서관에 갈 때마다 찾아서 스크랩을 만들어 아빠 책상 위에 놓았다.
아빠는 다음날 아침에 쉐리의 머리에 입 맞추고 직장엘 갔다. 쉐리는 학교에서도 아빠가 버스를 안전히 운전하기를 짬 날 때마다 기도했다. 아빠는 20년을 넘게 디트로이트 시 버스를 운전하고 계신다. 아빠 운전석 앞에는 쉐리가 그린 호수의 그림이 매달려 있다. 아빠는 피로할 때마다 쉐리가 그린 호수를 바라본다.
금요일 아침 엄마가 간호원 가운을 입은 채로 학교로 달려왔다. 쉐리는 아빠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짐작하고 눈물부터 흘렸다. 엄마는 차근히 아빠가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고 했다. 둘은 승강기를 타고 7층 병동까지 올라갔다. 엄마는 쉐리 손을 꼭 잡고 손으로 이야기했다. 쉐리야, 미안하다. 엄마는 아빠가 그렇게 심하게 앓고 계신 것을 너에게 말해줄 수가 없었지. 아빠는 심한 심장병을... 혹 우리와 함께 사실 수 없을 지도 몰라. 엄마는 쉐리의 손을 더욱 무겁게 잡고 있었다.
아빠는 그 다음 다음날 눈을 감으셨다. 아빠의 손에는 쉐리가 그린 물오리 한 마리 그림이 꼭 쥐어져 있었다.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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