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에 해가 기울 듯 여름날이 가을로 점점 기울고 요란한 매미소리는 가을을 재촉하며 텅 빈 내 마음을 을씨년스럽게 만드는구나.
지나가는 세월에 개울물 흐르듯 내 곁을 스쳐간 사람들은 많았으나 내가 항상 원하던 포숙아와 같은 친구가 없는 것이 부끄럽구나. 중국 고사에 나오는 관포지교가 생각난다. 제나라 때의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은 모든 사람의 부러움의 대상일 것이다. 중국사기에 이렇게 씌어져 있다.
관중이 포숙아와 함께 장사를 한 일이 있었다. 언제나 이익 분배에 있어서 관중은 더 많은 것을 취했다. 그럼에도 포숙아는 그를 욕심쟁이라고 탓하지 않았다. 그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관중은 포숙아를 위해 어떤 일을 꾸몄으나 도리어 포숙아를 곤경에 빠뜨린 일이 있었다. 그러나 포숙아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시세의 유리할 대와 불리할 때가 있는 줄 알고 있는 까닭이다.
관중은 세 번이나 군주를 섬겼다가 파면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포숙아는 그를 무능하다 비웃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시운을 못 만난 줄 알고 있는 까닭이다.
관중은 전쟁터에 나가 세 번이나 도망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포숙아는 그를 비겁하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늙으신 어머니가 있는 까닭이다.
관중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씌어 있다고 한다. “나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이나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아다.”
포숙아의 아량과 관대함은 과연 내가 부러워만 했지 포숙아를 닮으려 하지 않았구나. 그러면서도 염치없이 나를 관중의 위치에 두고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포숙아 처럼 되길 원했으니 참으로 어리석지 않은가.
성실한 친구는 안전한 피난처요 보화를 지닌 것 같고, 좋은 친구는 생명의 신비한 약이라 했다.
늦은 감은 있으나 이제부터 나도 포숙아가 되려 노력하며 실행하면 삭막한 이 마음에 서서히 기쁨의 향기가 피어나지 않을까.
동심초 스프링필드,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