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는 기본적인 가설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과거보다 나아졌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타인보다 낫다는 비교우위다.
행복을 의미하는 영어의 Happiness 는 옳고 바른 일이 자신 속에 일어난다는 뜻을 가진 Happen 에서 나온 말이다. 행복이라는 어휘는 삶에 대한 긍적적인 신호이면서 삶의 질을 상징한다. 행복의 위치는 자기자신 속이다. 혼자서 경험하며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다만 행복의 크기가 마음크기와 정비례하는 거라서 행복의 가치 기준이 애매모호한 것도 사실이다.
절대적인 행복이 무엇인지 절대적인 불행이 무엇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게 사람 사는 일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인생이 없고, 완성된 삶이 없는 걸 보면, 역시 산다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과정인 게 분명하다. 시인 ‘칼 붓세’ 는 그의 시 행복론에서 행복이 저 산너머에 있다기에 가보았더니 거기에 행복은 없더라고 읊었다. 어린 오누이가 파랑새를 잡으러 온종일 헤매다 지친 끝에 집에 돌아오니 파랑새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벨기에 시인 마테롤링크의 파랑새다.
그러고 보면 행복은 순간순간에 존재하는 추상적 개념일 뿐 과거에 없는 것도 미래에 있는 것도 아닌 지금 생산되는 지극히 단순명쾌한 정서인 모양이다. 행복을 느끼고 행복감에 젖어들면 그 행복이 비록 일순에 지나갈지라도, 마치 캄플 주사처럼 삶의 자극제가 주어지기 때문에 그저 마음 편해지고 가슴 뿌듯하고 정신이 맑아지면 그만이다.
현대인은 단순한 삶이 또 다른 행복의 원천(源泉)이라는 것을 잊고 산다. 행복을 거창한 것쯤으로 부풀리며 사는 까닭에 행복의 기준마저 상실하기 알맞다. 세상에는 저장된 행복이 없거니와 만들어진 행복은 없다. 행복은 관상용도 아니다. 행복이 결코 화려하고 호화로운 것도 아니며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것도 아니다. 행복하게 보인다고 해서 행복한 사람이 없고 불행해 보인다고 해서 불행한 사람도 없다. 행복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정작 불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행해 보이는 사람이 가슴속에 희망과 행복을 품고 사는 경우도 있다.
아름다운 음악을 세 번 이상 듣게되면 권태로워지고, 듣기 좋은 말씀도 세 번 이상 되풀이하면 잔소리로 들리는 법이다. 열흘 붉은 꽃이 없는 것처럼 세상만물이 변하고 또 변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고, 내일의 나는 내가 아닐 것이다. 지금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마다 복잡한 심정을 털어 내야 한다. 버려할 것은 지금 버리고 잊어야 할건 지금 잊는 게 좋다.
정신이 시끄럽고 마음이 소란한 것은 행복이 아니다. 행복은 심각하지 않다. 초조하지도 다급하지도 않다. 생각보다 행복은 단순하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사는 것을 행복의 기초로 삼을 수 있다면 그 것 만이라도 행복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잘되겠다고 노력하는 그 이상으로 잘사는 방법이 없다.’ 실제로 잘되어간다고 느끼는 그 이상으로 큰 만족은 없다. 일찍이 쏘크라테스가 경험한 행복론이다.
문무일/파랑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