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친구 이야기

2005-05-25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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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설자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뉴욕 사는 여고 동창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국 전역에 사는 동기생들이 더 늙기 전에 부부동반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여행을 하자는 내용이다. 꼭 부부동반이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그렇지 않아도 터키, 그리스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어서 간다고 했지만 남편은 단체 여행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아 분명 여자들끼리 가라고 할 터이다.
친구는 10여 년 전에 15박16일로 다녀온 기막힌 추억이 있다며 유럽여행담을 털어놓는다. 영국 히드로 공항에서 각처에서 온 40여 명과 가이드와 만나 한 팀이 되어 버스로 여행을 시작, 브뤼셀, 네덜란드 등을 거쳐 극치의 자연미를 자랑하는 스위스에 도착하기까지 여행은 너무 즐거웠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빨리 움직여야 단체행동에 보조를 맞출 수 있는데 남편이 어찌나 늑장을 부리는지 빨리 오라고 신호를 보냈단다. 그러나 남편은 느릿한 걸음으로 식탁에 와 앉더니 느닷없이 자기 발등을 사정없이 밟았다. 일행이 눈치챌까봐 비명도 못 지르고, 얼굴을 웃고 눈물이 찔끔 나오는 것을 참았다. “조용하고 착한 남편이 별안간 폭군이 되다니 간 큰 남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구나” 생각하며 이럴 땐 어떻게 하나 궁리하다 일단은 모르는 채 하기로 했다고 했다.
알프스 설경에 매료되고, 빙하가 할퀴고 간 면도날처럼 뾰족한 고봉들 사이로 바닥까지 훤히 보일 것 같은 알파인 호수의 그림 같은 풍경에 감탄하며 호텔에 돌아와 보니 발등에 멍이 시퍼렇게 들어 있었다. 슬펐다. 그러나 남편은 발등 밟은 기억은 전혀 없어 보이고, 이왕 비싼 경비 들여 온 여행인데 이 문제가 거론되면 피차 남은 여행이 엉망이 될 것 같아 침묵으로 인내하며 혼자 가슴앓이를 했다.
마지막 여행지 프랑스 관광을 끝내고 공항 대합실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슬며시 멍든 발등을 보여주었단다. 남편은 깜짝 놀라며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데, 정말 몰랐던 것인지 자초지종 설명을 듣고 나서는 생각이 난다며 “어련히 가서 앉을 텐데 일행도 많은데 아이같이 보채는 것 같아 순간 화가 났었다”고 말했단다. 그리고는 “혼자 가슴앓이 하면서도 좋은 여행을 위해 내색 안하고 참아줘서 고맙고 사랑스럽다”고 하면서 신사도를 벗어난 비겁한 행동이 부끄럽다고 용서를 구했단다.
갑자기 지혜로운 친구의 얼굴이 보고싶어진다. 서양 속담에 “결혼 후 3개월은 서로 관찰하고, 3년은 사랑하고, 그리고 30년은 용서하며 살아간다”는 말이 있다.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 한 지붕 밑에서 평생을 같이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예술행위에 준하는 고도의 창작세계라고 생각한다.
후두둑 소리를 내며 소나기가 지붕을 한없이 두드리는 밤이다. 친구야, 세상 다하는 날까지 참으며 용서하며 사랑하며 멋진 삶을 살기 바란다.
유설자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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