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전 업무 차 뉴욕에 갔다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중이던‘Other People’s Money’라는 풍자극을 재미있게 관람했다. 자기 호주머니 안의 돈은 가족을 위해서도 쓰지 않는 구두쇠가 남의 돈은 한줌 양심의 가책도 없이 마구 뿌리며 통 큰 짓을 한다. 이 이야기는 그 뒤 영화화돼 극 제목에서 딴 신조어‘OPM’을 크게 유행시키기도 했다.
1997년은 한국경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그해를 기점으로 베일에 감춰져온 재벌기업들의 실체가 들어 나기 시작했으며 IMF 경제위기는 소비자와 기업에게 두루 현실을 깨닫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재벌 기업들은 일반인의 상식이나 초보 경영자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기상천외의 회계방식으로 시종일관 장부 도식에만 전념해 왔다. 숫자라면 골치 아파하는 평범한 가정주부조차도 자녀교육과 주택 장만 등을 위한 장기대책으로 매달 저축해가며 달마다 수입과 지출을 예상하고 그에 따라 정확히 집행한다. K-마트에 갈 수입밖에 안 되는 사람이 니만 마커스 백화점에서 샤핑하지는 않는다.
재벌기업들은 다르나. 최근 구 현대그룹의 빚 규모가 일부 밝혀져 우리를 놀라게 했다. 현대건설 하나만 예로 들어도 2000년 총매출액 6조4천억원, 영업이익 243억원에 이자 부담은 5천6백억원이었다. 이 회사의 총 부채액은 물경 8조1천억원이라고 한다. 영업이익이 이자액의 4%밖에 안된다. 그해 영업 이익을 모두 이자 갚는데 쓰더라도 5천3백억원 이상이 이자 미불액으로 새해부터 원금에 더해진다.
정부는 출자전환 명목으로 지난 3월말 또다시 2조9천억원을 현대건설에 투입키로 결정했다. 이로서 연 6조원을 밑 빠진 독에 쏟아 부은 셈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6조를 1원당 1초로 환산하면 1,935년에 해당한다. 거의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엄청난 기간이다.
연간이자 부담액이 영업이익에 육박하거나 초과한다면 그 기업에 적신호가 켜진지 이미 오래됐다고 봐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원금회수를 바라는 것보다 갓난아이가 정상으로 자라서 살다가 늙어 죽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더 확실한 일이다.
한국 정부는 재벌 기업이 파산하면 실업 문제 등 국민 경제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밑빠진 독에 물 붓는 식일 지라도 계속해야 한다는, 지극히 비경제적이고 도착된 논리를 정당화하기에 급급하다. 한 마디로 전혀 설득력 없는 주문(呪文)이 아닐 수 없다.
재벌 중심의 구조적 병폐 때문에 골병이 들어가고 있는 국민경제와 재벌이 회생했을 때(그 가능성조차 불투명하지만) 국민들에게 돌아올 실리를 비교해본다면 경제적 결론은 극히 간결하게 난다.
재벌 기업들과 관련한 천문학적인 기회 비용은 왜 무시해야 하며 수천 개의 건전한 기업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희생은 왜 전혀 따지지 않는지 한국정부에 물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