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화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윤택해졌다. 예를 들어 전기가 발명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라. 우리는 지금도 단군조선 시대처럼 호롱불 아래서 책을 읽고 쌀과 보리도 물레방아로 찧고 있을 것이다. TV, 전화, 인터넷은 공상소설 속에나 나오는 물건들일 것이고 스페이스 니들엔 엘리베이터 대신 층계가 설치돼 있을 것이다.
과학 발전은, 그러나 인류에 문명과 더불어 위기도 함께 안겨줬다. 써먹어선 안 될 원자탄을 발명해 놓고 온 인류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과학발전의 부수물인 환경오염이 지구 온난화 현상을 초래해 온 생물이 궤멸할 것이라는 겁나는 소리도 있다. 올 겨울 서북미 지역에서 비가 좀 덜 내리자 곧장 전력위기 상황이 돼버렸다.
이처럼 병주고 약주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최근 들어 새로운 고민거리를 만났다. 윤리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우주탐사와 컴퓨터 개발 과정에서도 이 문제가 대두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 기술이 소를 복제해 내는 지경에 이르자 과학 발전의 윤리적 한계 문제가 새삼 거론되고 있다. 지난 주 타임지는 불임 부부나 자녀를 상실한 부모가 복제기술을 통해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될 날이 임박했다며 벌써부터 그 부작용을 진단하는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배아 연구나 체세포 복제 등 생명공학 분야에서 일고 있는 보수적 거부반응 외에 동서 의학을 접목한 대체의학 분야의 윤리적 도전도 간과할 수 없다. 한의학과 서양의학은 두루 자연요법을 망라하고 있다. 자연 과학인 의료문제와 사회과학인 윤리문제 사이에 분리할 수 없는 연관 고리가 묘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임여성을 임신시키고 불치병을 앓는 시한부 생명의 환자에 세포배양 등 첨단의학을 통해 건강을 회복시켜준다면 이를 비윤리적 행위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될 때는 언제나 당시의 사회인식을 배경으로 한 저항과 반대가 있게 마련이었지만 결국 과학기술은 계속 발전해왔다.
바로 154년 전 금주에 태어난‘발명의 왕’토마스 에디슨도 전구와 축음기 등 숱한 문명의 이기들을 발명해내며 이 같은 현실적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했다. 에디슨 말고도 많은 과학자들이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비판대상이 됐다. 프랑스에서 계산기가 발명되자(1642) 사람들은 이를 낭비라고 비아냥 했고, 화란의 시계 발명(1657)과 독일의 개솔린 엔진 발명(1889)도 찬사보다는 비난을 더 많이 받았다. 미국에서도 전화(1876), 무성영화(1894), 비행기(1896), 타자기(1897), TV(1927), 자동 컴퓨터(1944) 등 생활 필수품들이 발명될 때마다 사회로부터 냉대를 당했었다.
자고로 법과 윤리와 종교가 과학 탐구에 저해요소가 된 예는 허다하게 많다. 오늘날에도 기성세대의 보수적 가치관과 윤리관 및 학문적 편견이 신진 과학도들의 탐구열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고 있다. 젊은 과학도들의 탐구열을 격려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야한다. 한인사회도 과학기술 분야에서 유망한 젊은이들을 양성해야 한다. 남보다 앞을 멀리 내다보는 이들의 비전과 탐구열이야말로 우리의 민족적 긍지며 인류사회의 희망이다. 돈이 힘이 아니라‘아는 것이 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