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가는 탓인지 모르지만 새로운 문명의 이기나 발명품이 시장에 나올 때마다 양팔을 들어 환영하기보다 귀찮은 생각이 앞선다.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고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각종 신제품들이 나에겐 회의적으로, 심할 때는 비관적으로까지 보인다.
여러 해전에 구입한 물건들도 그 사용법을 완전히 익히지 못해 기능의 절반도 이용하지 못하며 쩔쩔매는 판국인데 다시 몇 차례씩 모델이 바뀌고 일일이 기억 못할 정도로 끝도 없이 더해진 많은 기능들은 우선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용도의 범위를 크게 초월하는 제품을 양산하며 수명도 다하기 훨씬 전에 폐기 처분을 강요하는 생산자들의 심보는 무엇인가. 소비자 보이콧 운동이라도 나부터 시작해야 할 판이다.
매뉴얼을 헌신짝처럼 내 던지고도 콧노래를 부르며 척척 알아서 손끝을 놀리는 우리 집 작은놈이 내심 부럽다. 사용자 안내 책자를 일독하고도 끙끙대며 귀찮을 정도로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는 내 꼴이 우습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 스스로도 한심한 생각 끝에 은근히 화가 나기 시작한다.
일상 생활의 편리를 도모한다는 신기술 제품을 다 휴대하고 다니려면 힘 좋은 품꾼 한 사람은 사야한다. 컴퓨터, 프린터, 프로젝터 등을 카트로 끌어야 하고 비퍼, 페이저, 전화기 등을 전화수리공처럼 혁대에 줄줄이 매달고 다녀야 현대인 행세를 할 수 있다. 거기다가 페이저에서는 연속 삐삐 소리가 나고 전화기 안에는 메시지 여나무개는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 세력 깨나 있는 사람으로 비친다. 보행중에는 물론이고 소변을 보면서까지도 끊임없이 통화중이라야 밥벌이를 하는 사람 같다. 이쯤 되면 기계가 사람을 위해 있는 건지, 사람이 기계를 위해 존재하는 건지 혼동된다.
나는 지난 10년 이상 사무실 비서의 애원을 뿌리치며 셀룰러폰 휴대를 거부해 오고 있다. 직장 밖에서까지 스스로를 속박하며 살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리고 세상살이 일들이란 대개 하루쯤 기다린다고 절단 나는 것이 아니고, 알고 보면 당장 해결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시간만 주면 스스로 풀리는 하찮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디서든 24시간 일하지 않는다고 시대에 발 맞추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사랑도 하는 것이 사람 사는 맛인데 시도 때도 없이 쉴새없이 침해받아야하는 삶이라면 그것은 삶도 아니다.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없는 시간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많은 발명품들은 편리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느 한쪽이 죽어야 한다면 기계가 죽어야지 사람이 죽을 수는 없다.
출근후 e-메일을 체크하다 셀폰이 울리면 응답해야 하고 탁상 전화 벨이 울리면 그것도 처리해야하며 옆에서 기다리는 비서와 그날의 일정도 짜야한다. 한꺼번에 대여섯 가지 일을 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 하나하나에 똑같이 온 신경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관심을 쪼개 쓰다가 작파하고 만다. 어느 한가지 일에도 집중할 수 없어 만사가 적당히 돼버리며 결국 스피드가 성공의 척도가 된다.
사무실에 전화해서 내가 없으면 상대방은 의례 셀폰이나 페이저 넘버를 요구한다. 사무실밖에 있어도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날아가는 기회를 정지시키고 붙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말해야 하며 들어야하고 보아야 한다.
혼이 나간 상태에서 자폐증 환자를 부러워하는 상황이 현대인의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