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문턱에서‘연인의 날’을 맞았다. 오늘은 정인절(情人節)로 불리는 발렌타인 데이다. 연중 장미꽃과 초콜릿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날이고 결혼식도 다른 날보다 많이 거행되는 날이다. 이날 아무런 애정 표현 없이 어물쩍 넘기려 들다가는 아내나 애인으로부터 십중팔구 호되게 당한다.
미국인들은 애정 표현이 생활화돼 있기 때문에 따로 발렌타인 데이가 필요 없을 듯한데도 그게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2월에 접어들자마자 카드, 장미꽃, 초콜릿, 화장품, 보석 등 발렌타인 상품이 넘쳐흐른다. 야한 란제리나 최음제를 세일하는 섹스 숍 광고도, 연인들을 손짓하는 리조트 호텔 광고도 늘어난다. 발렌타인 데이를 발렌타인 나이트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한인들은 은근과 끈기의 유교적 문화배경 탓에 애정 표현도 소극적이며 정적이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하는 애정 표현을 부도덕 행위로 치부한다. 결혼식에서의 신랑신부 키스도 한 세대 전까지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니 발렌타인 데이라고 해서 애정표현이 갑자기 자연스러워질 리가 없다.
발렌타인 데이는 언제부턴지 미주 한인사회보다 오히려 한국에서 더 요란 떨떨해졌다. 전혀 남의 나라 풍속인데도 안 지키면 큰 일 나는 듯 야단들이다.‘올 발렌타인 데이는 꼭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해야한다’는, 미국에도 없는 요상한 말까지 퍼져 향수 등 여자 선물용품이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미국은 미국대로, 한국은 한국대로 애정 표현의 날을 따로 정해놓을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발렌타인 데이가 해마다 기승을 떠는 것은 아무래도 상술의 농간 때문인 듯하다. 크리스마스에 장난감 회사들이, 추수감사절에 칠면조 영농가들이, 핼로윈 데이에 사탕 공장과 호박 장수들이 각각 수지 맞는 것과 매 한가지다.‘비서의 날(Secretary’s Day)’까지 있어서 꽃집과 문구점들이 매상을 올린다.
원래 발렌타인 정신은 이런 장사 속과는 거리가 먼 숭고한 휴매니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전설이긴 하지만 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가 금혼령 기간중에 같은 성을 가진 애인들을 결혼시킨 한 신부를 화형에 쳐한데서 이 풍습이 비롯됐다고 한다. 일설에는 새들이 봄철에 번식하는 생태현상에서 착상됐다고도 하고 로마제국이 야생동물을 쫓아내기 위해 매년 봄 주민들을 동원한데서 비롯됐다고도 한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화제의 책을 쓴 인기 작가 존 그레이스는“발렌타인 데이를 성공적으로 보내기 위한 몇 가지 조언”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선물은 비싼 것보다 사소해도 감동적인 것을 택하고 속옷 등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물건은 피하라고 권한다. 예를 들면 예쁜 노트에“설거지하겠다”“아침식사 준비(또는 집안 청소)를 (몇번) 하겠다”“마사지를 (10분간) 해주겠다”는 등 짧고 구체적인 애정 표현을 적어주면 여자들은 감동한다는 것이다.
우리 한인들도 좋든 싫든 발렌타인 데이를 현실 문화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적극적인 애정표현이 쑥스러우면 상대방에게 은근한 미소로라도 마음을 전하자. 우리 조상들은 입춘 날 대문에‘소문 만복래’라고 써 붙였다. 웃는 집은 문으로 만복이 들어온다는 뜻이다. 입춘과 비슷한 시기에 오는 연인의 날 발렌타인 데이에 우리는 웃는 얼굴로 상대방의 복을 빌며 사랑을 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