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척, 척, 척

2000-06-26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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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들 사이엔 바쁜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영락없이 찬밥신세가 된다는 인식이 만연돼 있는 듯 하다. 본국에서도, 재미 한인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첫 인사부터 "바쁘시죠?" 아니면, 좀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요즈음 어얼마나아 바쁘세요?"이다. 이런 인사를 들을 때마나 나는 매우 난처해진다. 거짓말로 수다떨어야 할지, 참말을 고백해야 할지 혼돈 속에 빠지고 만다.

이럴 때 내 대답은 분명히 거짓말하는 쪽이다. 사실을 얘기해봤자 가벼운 거짓말로 들릴 뿐이거나 심하면 바쁜 줄을 세상이 다 아는데 안 바쁜 ‘척’하며 내숭을 떠는 오만으로 잘못 비춰질 위험까지 각오해야 한다. 그날 마침 다소 바삐 지냈으면 "아, 조금 바빴습니다" 란 대답으로 안도의 숨을 쉬며 위기를 모면하지만 그렇지 못할 시에는 죄책감까지 생기며 심각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고민에 빠진다.

"바쁘다 바빠"라는 말을 연발하며 돌아서서 셀룰라폰에다 모기 같은 목소리로 말을 쏟아 붓자마자 또 다시 휴대폰 벨이 울릴 정도가 돼야 체면도 서고 주위사람들에게 인생을 충만하게 사는 표시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송구스러울 지경이다. 끼니 찾아 먹을 시간도 없다고 불평 비슷하게 하면서도 스스로는 극히 만족스러운 모습이다. 이런 사람과 시간 약속 한번 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고 환자가 줄을 잇는 명의한테 진찰 받기보다 더 힘든다. 이쯤 되어야 사업도 날로 번창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가 알기로도 대한민국(차마 세계라는 말은 쓸 수 없고 그냥 한국이라고 했다가는 너무 좁은 땅덩어리로 느껴질 때 쓰는 국명임)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넷이나 된다. 바쁘다고 해야 출세했다고 믿는 본인들이나 부인의 입을 통해서 들은 얘기이다. 이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약속을 아예 안 지키거나, 지정된 시각에 나타나지 않거나, 늦게 나오고서도 안절부절못하며 남들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무료한 순간 없이 보람된 일을 하며 바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삶은 축복이다. 그러나 자신의 콘트롤 밖에 있는 시간은 이미 남의 것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윤택한 생활은 시간의 여유가 없을 때에는 불가능해진다.

전후 한국에서는 판잣집에 사는 여인들 중에 겉치레를 중요시하고 화려한 옷차림으로 정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생활수준으로 인격마저 평가하던 시절이어서 옷차림이 허술하면 무시당했던 세태를 반영한 현상이다. 자동차를 신분의 심볼로 생각하며 셋집에 살더라도 고급 차를 타는 요즘 사람들의 어리석은 가치관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한가한 사람으로 비춰졌다가는 사회 신분이 낮은 별 볼일 없는 사람쯤으로 취급당하고 마는 이치와 무엇이 다른가? 목에 힘주고 주위에서도 우러러 볼 정도가 되려면 바쁜 시늉이라도 잘 해야 한다.

소문은 참 미묘하다. 잠시 돌다가 사라지는 것도 있지만 수정을 거듭한 끝에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변하고서도 마치 진실인양 뻗어나가는 것도 있다. 악의가 아니더라도 전혀 예상 밖의 결과를 초래하는 일도 적지 않다. 특히 소문이 선입견과 일치하면 신빙성도 커진다. 평소 바쁠 것으로 생각되던 사람이 실제로 바쁘게 산다는 소문이 돌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으로 여겨진다.

나는 한번도 내 자신을 바쁜 사람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러나 헛소문과 사람들의 선입견 탓으로 한인사회에서 가장 바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 것 같다. 바쁠 것으로 소문난 뒤로부터 점점 만나자는 사람 수가 줄어들더니 요즘은 전화를 둘 필요성조차 못 느낄 정도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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