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의 필자인 김형찬 교수는 12일 평양으로 떠났습니다. 김교수는 약 1주일간 역사의 현장에 머물며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본 후 귀국, 이 회담의 성과를 분석·해설하는 칼럼을 본보에 계속 기고할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이제, 북한당국이 정상회담에 적극 호응하게된 북한 내 사정을 살펴보자.
먼저 북한산업의 낙후성과 경제침체를 지적할 수 있다. 북한의 산업시설은 해방당시에는 남한보다 앞섰고 다양했으나 6·25 동란도중 미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다. 휴전후 사회주의 국가들, 특히 소련과 중국의 원조로 산업시설을 복구했으나 80년대, 특히 1990년 후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이은 몰락으로 북한의 기간산업은 부품조차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북한의 산업시설은 거의 문을 닫았으며 실제로 고철로 팔린다고 귀순자들은 전하고 있다.
이처럼 낙후된 산업시설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데 이런 자본을 북한에 투입할 능력이나 의향이 있는 국가는 나서지 않고 있다. 김정일은 최근 중국 방문중 장쩌민 주석에게 20억달러의 원조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에 그만한 원조능력은 없다고 본다. 일본으로부터 보상금을 받아내는 것 또한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북한에 투자를 할 수 있고 또 할 의도가 있는 자본가들은 남한 외에는 없다는 것이 북한의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북한 경제침체는 지난 3~4간 주민들을 기아상태로 몰아넣었다. 영양실조로 인한 폐결핵 환자들이 늘어난다는 소식이다. 북한경제는 수년간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해왔는데 금년도 예외는 아닐 것으로 추측된다. 어느 국가건 경제의 원동력인 에너지가 부족하면 근본적 문제를 노출하게 된다. 북한은 산업시설을 움직일 에너지가 태부족, 현재 공장 가동율이 30%도 안 된다고 한다. 이런 문제를 단시일내에 해결할 수 없는 북한으로서는 외자를 유치, 에너지 생산과 공급을 원활하게 할 수 밖에 없는데 이 문제 해결 또한 남한이 그 관건을 쥐고 있다.
셋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치권과 그 정당성의 문제다. 1972년 당 중앙위원, 다음해에 부장 및 당 비서를 거쳐서 1974년 정치위원이 되면서 당 중앙이라는 호칭을 받은 김정일은 1980년 10월 노동당 제6차 회의에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등장했다. 거의 4반세기 동안 북한의 내부 실력자로서 통치력을 행사한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아버지를 이어 최고 통치권자가 됐으나 경제문제와 군 통솔문제 등으로 통일분야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나 금년초부터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포함하는 강성대국의 슬로건을 내걸고 자신의 통치력을 외부적으로 과시했다. 그 일환으로 5월말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고 이제 드디어 납북정상회담까지 갖는다. 김정일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직접회담을 통해 자신의 통치력에 대한 정당성을 북한주민에 과시할 기회를 갖게 된다.
넷째, 국제적 환경, 특히 북한의 대 일본 및 대 미국 관계를 지적할 수 있다. 북한과 일본은 몇 차례 외교접촉을 통해 현안인 대북한 보상문제를 타결하려 했으나 북한이 요구하는 액수와 일본이 요구하는 북한내 일본인 납치자 송환문제가 맞서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일본은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원하지만 남한과 미국의 대북한 정책을 전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남북한간의 대화를 종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과 미국의 외교접촉은 북한의 영변 핵 발전기지를 둘러싸고 시작, 한반도 에너지 발달기구를 발족하는 등 지금까지 몇 가지 성과를 거뒀으며 실종미군 유해 송환을 빌미로 관계개선을 위한 회담을 베이징에서 갖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