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윌셔에서] 넉넉한 하루

2026-05-21 (목) 12:00:00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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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가 헐렁하다.

삼 차선을 빽빽하게 메우던 차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텅 빈 도로 위에는 늦은 오후의 햇살만 길게 몸을 눕히고 있다. 바람조차 서두르지 않는다. 나뭇잎 몇 장이 느릿하게 몸을 뒤척이고, 신호등 아래 드리운 그림자들도 한가롭게 늘어져 있다. 마치 동네 전체가 “열중쉬어” 자세로 깊은숨을 고르는 것 같다.

해마다 오월이면 대학촌인 이곳은 짧고도 뜨거운 몸살을 앓는다. 졸업식을 맞아 사방에서 몰려든 가족들과 축하객들로 거리는 북적이고, 식당은 긴 대기 줄로 넘쳐난다. 호텔은 빈방 하나 남지 않고, 꽃집마다 환한 웃음과 향기가 피어난다. 축하의 계절은 눈부시지만,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하루는 전쟁에 가깝다. 주문받고, 음식을 나르고, 테이블을 치우다 보면 하루는 손바닥의 물처럼 빠져나가 버린다. 언제 해가 떴고 언제 저물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축제가 끝난 유원지처럼 모든 것이 갑자기 멈춘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로 들끓던 거리에는 적막이 천천히 내려앉고, 시끌벅적하던 식당 창가에는 햇살만 조용히 남아 의자 끝에 걸터앉아 있다. 직원들의 움직임도 한가롭다. 몸은 쉴 수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벌써 불안의 바람이 인다. 올여름은 장사가 얼마나 되려나? 학생들이 돌아오는 7월까지 잘 견뎌 낼 수 있을까…

뒤늦게 시작한 이민자의 삶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완전히 알아듣지 못한 말을 눈치로 메우고, 서툰 발음과 어색한 미소로 손님을 상대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작은 가게를 꾸려 간다는 것은 결국 내 몸을 끊임없이 노동의 자리로 밀어 넣는 일이었다. 내가 쉰다는 것은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한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곧 늘어나는 인건비와 줄어드는 수입을 의미했다. 바쁘면 몸이 힘들었고, 한가하면 마음이 힘든 날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스스로 단단한 사람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열심히 일해서 얻은 경제적인 여유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때는 그 모든 평온이 나의 성품인 줄 알았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그동안 모아둔 재산을 모두 잃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동안 나를 지탱하던 것은 ‘나’가 아니라 ‘돈’이었다는 것을.

십 년 넘는 세월을 가난하게 지냈다. 가난은 자주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무너져 내리는 나를 붙들고 통곡했지만, 그래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하루를 살아도 즐겁게 살기로 했다. 마음을 바꾸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세상이 보였다. 돈은 없었지만, 운영하는 식당에 식자재는 늘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직원들과 나누고, 이웃을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런 시간 속에서 무거운 먹구름에 눌려 있던 나의 삶에 점차 따사로운 햇살이 들기 시작했고, 내 안에서 ‘나’가 단단하게 자라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이제는 보릿고개 같은 여름이 와도 예전처럼 불안감에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만큼은 단단해진 것 같다. 가난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 가난속에서 넉넉하게 사는 방법을 배운 것은 내 인생 최대의 수확이다.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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