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음속의 주름살

2026-02-18 (수) 08:00:25 윤영순 메리옷츠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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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때처럼 밤열시가 한참 지난 시간, 막 잠이 들었는데 요란스럽게 스마트폰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순간 페이스톡으로 화면이 바뀌고 태평양 건너 한국에 있는 두 언니가 얼굴을 내밀며, “자다가 놀랬지?” 웃으며 반긴다. 며칠후면 구정을 맞는다고 셋째 언니가 요양원에 있는 큰언니를 찾아가 점심을 함께하며 잠자는 나를 깨운 모양이다. 우리 네 자매중 큰언니와 셋째 언니는 서울에, 둘째언니와 막내인 나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이 시간은 서울과 메릴랜드의 시차가 밤과 낮이다.

몇년전 구순을 넘긴 큰언니가 치매 초기 판정을 받고 혼지서 외출하기가 어려워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해도 큰 언니는 활동하기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노년의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였었다. 시설의 허락을 받고 잠시 밖으로 나와 얼굴에 남겨진 세월의 흐름을 보자면서 두 언니가 페이스톡으로 화상통화를 할때면 수만리 떨어진 거리감도 잊게하는 카카오톡 세상이 주는 편리함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언니야, 나도 이제는 얼굴에 주름이 많아져서 거울 보기가 겁나고 싫어”하는 막내 동생의 투정에 큰 언니가 불쑥 대꾸를 해 온다. “겉에 보이는 주름은 그래도 괜찮아. 마음 속 깊은 속 주름만 없으면 돼.” 곁에서 듣고있던 셋째 언니가, “와, 우리 언니 명언을 했네. 맞아, 속상해서 생기는 마음의 주름만 없으면 늙어 보이는 것쯤은 아무 문제될 것없어. 그저 편하게 살라는 뜻일 거야.”


그리고 보면 사람은 이렇게도, 또는 저렇게도 살아 간다고들 하지만, 큰 언니의 이 말은 유난히 굴곡이 심했던 자신의 체험을 동생들에게 넌지시 일러주는 말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잊어비리게 될 큰 언니의 외로운 삶에 마음이 더욱 눅눅하고 짠해진다. 언니들과의 통화를 끝내고 잠을 청해도 이런 저런 잡다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다시금 쉽게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사이, 꿈인지 생시인지 그 옛날 어렴풋이 기억 저편에 남아있는 몹시도 추웠던 구정이 머리에 떠오른다. 떡국을 만들기 위해 물에 잔뜩 불린 쌀통을 머리에 이고 칼 바람을 맞으며 방앗간 앞 에서 긴 줄을 서서 기다리던 모습이며, 뽑아온 떡가래를 쫀득하게 말린뒤 칼로 동글동글하게 썰어 여러개의 소쿠리에 나누어 담는 것도 엄마를 도와주는 큰 일중의 하나였다. 그런가하면, 어버지가 엿강정을 만드시는 힘든 일을 우리들 네 자매가 거들어 드리던 명절의 별미 음식과 정겨운 설 풍경은 이제는 한편의 그림으로만 남아있다.

누구나 세월의 주름살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 마음속 깊은 곳에 주름살이 자리잡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노년기 각자의 몫이 아닐까? 큰언니의 명언을 재삼 생각나게한다.

<윤영순 메리옷츠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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