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독일 중부의 뒤셀도르프와 쾰른에는 유학생들뿐 아니라, 한국에서 광부와 간호사로 와 정착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어느 주일, 쾰른의 한인 교회에서 설교할 기회가 있어 그곳을 찾았고, 예배를 마친 뒤 라인강변에 서 있는 쾰른 대성당을 방문하게 되었다.
쾰른 대성당은 1248년에 첫 삽을 뜬 이후, 종교개혁과 전쟁, 시대의 격랑 속에서 무려 300년 넘게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가 1880년에야 완공된 독일 최대의 성당이다. 초석을 놓은 지 632년 만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첨탑과 빛을 끌어안는 장미창은 고딕 건축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 웅장함 앞에서 사람은 자연스레 말문을 잃는다. 그러나 이 대성당이 진정으로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러 온 세 동방박사의 유해가 안치된 보배함 때문이다.
별을 관측하던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신호를 따라 먼 길을 걸어왔다. 그 여정의 끝에서 그들이 마주한 것은 화려한 왕궁도, 장엄한 성전도 아니었다. 작은 농촌 마을 베들레헴, 초라한 집, 그리고 한 아기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앞에 주저 없이 무릎을 꿇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 세 가지 예물을 드렸다. 이 예물은 단순한 축하 선물이 아니라, 한 생명에 대한 깊은 신앙의 고백이었다.
첫째, 황금은 고대 사회에서 왕권과 권위를 상징하는 가장 귀한 금속이었다. 고대 사회에서 왕관과 보좌, 왕의 기물은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졌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황금은 이 아기를 참된 왕으로 인정하는 고백이었다. 별을 보고 메시아가 태어난 것을 안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 왕궁을 찾았다. 그러나 헤롯의 궁전에는 왕자가 태어나지 않았다. 별의 인도를 받은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촌 동네에 태어난 아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메시아가 고귀한 왕자가 아닌, 가장 미천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에 실망하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가? 세상의 권력과 성공 앞인가, 아니면 우리 삶의 참된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인가?
둘째, 유향은 향기를 내는 귀한 향료로, 고대에는 집안을 채우고 성전 제사에 사용되었다. 특히 곡식제사인 소제에는 반드시 유향이 필요했다. 소제는 히브리어로 ‘민하’라고 하는데, ‘선물’이라는 뜻이다. 소제는 죄 사함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드리는 선물과 같은 제사였다.
성전의 분향단에서 피우는 향을 만들 때도 반드시 유향을 섞도록 하였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향을 피우며 기도하였다(시 141: 2). 사도 요한은 분향단의 향은 성도의 기도들(계 5:8)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라고 말한다. 신앙은 말보다 먼저 향기로 드러난다. 오늘 우리의 가정과 일터, 공동체에는 어떤 향기가 퍼지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과 감사의 향기인가, 아니면 상처와 냉소의 냄새인가?
셋째, 몰약은 쓴맛이 강한 향료로, 왕과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을 때 사용되었고, 동시에 죽음과 장례의 순간에 쓰였다. 예수의 생애는 몰약으로 시작하여 몰약으로 끝난다. 탄생하실 때, 동방박사에게 몰약을 선물로 받으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약 백 근쯤 가지고 와 예수의 시신에 발랐다. 몰약은 아기 예수께서 영광만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구원을 이루실 메시아이심을 증언한다.
동방박사들의 세 가지 예물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2025년 성탄을 맞이한 오늘의 우리에게 주어진 부르심이다. 황금처럼 삶의 주권을 주님께 드리고, 유향처럼 그리스도의 향기를 일상 속에 풍기며, 몰약처럼 십자가의 길, 낮은 자를 향한 고난의 길에 동행하는 것. 그것이 성탄을 가장 성탄답게 살아내는 믿음의 예물일 것이다.
라인강변의 쾰른 대성당은 지금도 묵묵히 말하고 있다. 신앙은 웅장한 건축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별이 멈춘 자리에서 기꺼이 무릎을 꿇는 한 사람의 결단에서 시작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