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어머님이 기거하던 1층 방은 오래도록 볕이 든다. 그 방을 ‘생각하는 방’이라고 이름 붙였다. 가구를 정리한 방은 넓고 산뜻했다. 아인슈타인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에 들어가 몇 시간씩 혼자 있으면서 섬광처럼 아이디어를 얻거나 풀리지 않던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는 얘기를 들은 후로 나만의 방을 꿈꾸었다. 꿈꾸던 방은 처음 계획과 다르게 불순물로 채워지고 있다. 나를 텅 비워 시적 순간이라도 올까 기다리지만, 공간을 비우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
LA 한인타운에 약속이 있던 날 중고 서점에 들렀다. 동시집을 찾다가 알렉스 존슨의《작가의 방》을 발견했다. 50명의 유명 작가와 집필 공간을 담백한 수채화 그림과 함께 소개하는 책이다. 제인 오스틴 페이지를 가장 먼저 열어보았다. 좋아하는 작가이고, 바로 며칠 전에 영국에서 부쳐 온 그녀의 탄생 250주년 기념 티셔츠를 선물 받았다는 이유로.
오스틴은 집필실이라 부를 만한 공간을 따로 두지 않았다. 열아홉 살에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준 문구함을 받침대로 삼아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 《노생거 사원》의 초고를 썼다. 알렉스 존슨에 의하면 “시골집 거실에 빛이 가장 환하게 들어오는 창가의 아주 작은 십이각형 호두나무 테이블 앞에 앉아 매일 글을 썼”다. 집에서 만든 아이언 갤(iron-gall) 잉크와 깃펜으로 소설을 퇴고하고, 《맨스필드 공원》 《에마》《설득》을 썼다. 차를 끓이는 일 외에는 종일 글을 썼다.
오스틴은 가족 이외에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비밀리에 글을 썼다. 문이 삐걱대는 소리를 들으면 쓰던 글을 황급히 숨겼다. 당시 영국에서는 여성이 전문적인 창작자로서 공적으로 나서면 품위 없는 일로 여겼다. ‘By a Lady’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하고 통찰과 재치 넘치는 문장을 써 내려가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갔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이 탄생 250주년을 맞은 오늘날까지 불멸의 고전으로 사랑받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웹툰으로도 재탄생하는 콘텐츠가 되었다. 오스틴은 여성을 “사랑받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로 묘사하길 거부했다. 대신, ‘생각하는 여성들’을 등장시켰다. 사랑과 인간과 시대를 비틀고 풍자했다. 독립적인 사고, 직설적인 유머,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태도. 오스틴의 주인공들은 생각하고, 말하고, 실수하면서 성장해 갔다.
발랄한 독신녀 오스틴은 누군가의 ‘아내로서’가 아닌, ‘생각하는 여성’으로 살고자 했다. 소박한 방 삐걱거리는 문 너머에서 그녀는 여전히 속삭이고 있는 듯하다. ‘남들이 말하는 정상의 인생 코스 안 따라가도 괜찮아, 당신 생각을 말해도 괜찮아요, 당신 방식으로 살아도 괜찮아요’.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는 조카에게 그녀는 말했다. “나는 아주 작고 사랑스러운 캔버스에,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정밀하게 그리는 일을 한단다.” 그 캔버스 위에 펼쳐진 ‘평범한 삶’들은 지금도 생생하게 숨 쉬며 우리를 매혹한다.
“내 이성을 억누르려 했지만, 소용없었어요. 당신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오만과 편견》속 남자 주인공 다아시의 고백은 제인 오스틴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자 창작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듣고 싶은 말이 아닐까. 언감생심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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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영라 수필가 미주문협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