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며, 느끼며] 새해, 나를 돌아보자

2025-01-10 (금) 07:42:19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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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와보니 그냥 놀고 있는 중·노년 여성들이 없다. 평생 전업주부였든 오랜 직장에서 은퇴한 여성이든 여러 가지 강습을 받거나 운동을 하러 다닌다.

성남시 최대규모의 종합시설을 자랑하는 탄천 종합운동장 체육관에 가니 댄스스포츠, 한국무용, 살사댄스, 스쿼시, 요가 등을 배우는 여성들이 강습실마다 그득 한데 수영은 1년을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인기라고 한다.

종로구 가회동 자치회관은 프로그램 수강생을 분기별로 접수하는데 서예 교실, 한국꽃꽂이, 풍물놀이, 규방공예, 스트레칭 요가, 라인댄스 등 일주일에 한 번이나 두 번 교육/강좌를 하고 있다. 남자들에게는 당구, 바둑뿐 아니라 영어회화, 합창, 색스폰, 라인댄스도 인기라는데 정작 배우고 익힌 발표회 날 현장에는 무대, 객석 모두 60~70대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40~50년 된 동창생들은 모교에서 진행하는 합창단이나 골프반, 고전무용반에 소속되어 총동창회 모임에서 공연도 하면서 동문과의 우애를 끈끈하게 다지고 있다.

한 친구는 두 딸을 결혼시키고 혼자 살면서 성악, 라인댄스, 하모니카를 배웠고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주민센터 발표회장에서 라인댄스 공연도 했다. 하모니카는 밤에 자려고 누웠다가도 불도 안 켠 깜깜한 방안에서 연습을 하더니 배운 지 몇 개월 만에 독주도 한다.

다른 한 친구는 수십 년간의 교직에서 은퇴하고 사진을 배우더니 아예 4년제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시간만 나면 출사를 나가고 단체전도 하면서 사진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5대 고궁은 물론 수원 행궁, 선정릉, 여주 영릉 등등 고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거의 중년 이상의 여성들이다. 단체로 와서 해설사로부터 역사 공부를 하는 그들은 얼마나 부지런한지, 일분일초도 낭비 없이 사는 모습을 본다.

서울의 주민센터 강습비는 아주 저렴해 한 과목당 몇만원 정도다. 과목이 다양하고 강습비도 저렴하지만 관내 거주자가 아니면 안되는 곳이 많다. 백화점 문화센터는 아는 사람이 소개하면 강습비를 내고 배울 수 있긴 하다.

오랜 기간 무언가를 배우기란 힘들어서 보고 듣는 눈과 귀, 건강한 발만 있으면 되는 데일리 아트의 ‘길위의 미술관-김환기 편’ 문화탐방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김환기는 뉴욕에 1963년 도착해 1974년 61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11년간 뉴욕에서 살았고 2024년 뉴욕한국문화원에서 열린 김환기 50주기 특별전도 보았기에 서울에서의 행적이 궁금했다.

쌀쌀한 초겨울날 아침, 종각역 1번 출구에서 만난 30여 명은 그저 예술이 좋아서, 화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프로그램이 좋아서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박주형 미술사연구원의 김환기의 작품세계 강의에 이어 1948년 신사실파 1회 전시회(김환기 ‘달과 나무’ 전시)가 열린 화신화랑(화신백화점, 현재 종각타워), 김환기와 김향안의 결혼식 장소인 종로YMCA, 김환기가 운영한 종로화랑 자리 등 종로, 명동, 시청까지 걸어서 답사를 했다. 이날도 여성들이 대거 참가했다.

작가의 생가뿐 아니라 그들이 활동하던 지역을 찾는 일은 의미가 있다. 몰랐던 역사를 알게 한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한국에 장기간 다니러 온 한인들도 고향과 살던 집을 찾아보고 있다. 도시의 급속한 발전과 시대의 흐름으로 과거의 모습은 자취를 감췄지만 자신의 역사를 정립하고자 노력한다.

시골 논두렁, 밭두렁에도 세워진 고층아파트, 30층 아파트가 아니라 요즘은 50층은 보통으로 지어진다니 개발 지역의 집들이 그대로 남아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도 한국을 떠날 때의 기억은 머릿속에 고스란히 살아있으므로 살던 집 찾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다행히 40~50년 전과 달라지지 않은 골목의 옛모습을 만나면 감회에 젖곤 한다.

새해에는, 한국의 중·노년 여성들처럼 일분일초도 허투루 보내지 않기 바란다. 또 용케 살아왔네 경탄하고, 이만하면 잘 살았지 만족하기도 하고 그때 나는 잘못이 많았지 반성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도 하면서, 나를 돌아보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했으면 한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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