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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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셔에서] 처음처럼

2025-01-09 (목) 12:00:00 박연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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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다공증을 진단받고 한동안 커피를 끊었다. 카페인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빵 한 조각과 커피 한잔의 여유를 누릴 수 없는 나는 아이가 아끼던 인형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심정이 되었다.

처음 골다공증 진단을 받았을 때는 세상이 꺼질듯 절망했다. 허리가 굽어질 나이도 아니고 막 육십을 넘길 즈음 이었다. 이 병의 치명적 단점은 고통이 없어 경각심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골절이 되기까지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서 환자 취급을 받지도 못한다.

수년 동안 열심히 약을 먹었다. 처음에는 매일 먹는 약을 처방 받았다.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번거로움을 피하려 일주일에 한번 먹는 약으로 바꾸었다. 세상 모든 일이 좋고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그 약을 복용 후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든 점은 약을 먹은 후 적어도 한 시간은 움직이거나 밖으로 나가 걸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궁여지책으로 약 먹는 시간을 일요일 아침으로 정하고 한 시간 동안 좋아하는 축구 경기를 보며 허공에 발길질을 했다.


일 여 년 복용 후 주사약으로 교체했다. 6개월에 한 번씩 맞으니 한동안 잊고 지낼 수 있어 편하다. 물론 부작용이 만만치 않아 턱뼈가 괴사된다든지, 근육이 다 없어진다든지 하는 말을 들으면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로 약을 중단할 수 없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다.

맑은 날 마당에 나가 햇볕을 쪼였다. 누워 지내는 생활 습관을 바꾸고 되도록이면 계단을 자주 오르내렸다. 평생 운동을 해본 적이 없지만 큰맘 먹고 헬스장에 등록했다. 기구 사용법을 배워 무게를 조금씩 늘려 나갔다.

2년 동안 열심히 노력 한 후 골다공증 검사를 다시 했다. 모든 병이 다 그렇듯이 병을 얻기는 쉬워도 나아지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마음이 불안했다. 만약 전보다 더 안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앞으로 어찌해야할지 막막했다. 일주일 후에 결과가 나왔다. 예전보다는 조금 수치가 올라갔다. 아주 미미한 정도라 여전히 골다공증 약은 계속 써야한다. 아무튼 나아지고 있어 위안은 된다.

결과를 알고 난 후 나도 모르게 마음이 느슨해졌다.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골다공증 상태가 나아지니 좋아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오만으로 바뀌었다. 한동안 끊었던 커피에 자꾸 눈이 갔다.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닌데 내 삶에 커피 한잔의 즐거움까지 삭제한다면 무슨 낙으로 살까.

처음에는 커피 조금에 뜨거운 물을 많이 더하여 마셨다. 오랜만에 마시는 커피라 그런지 그마저도 풍미가 좋았다. 점차 커피 양이 많아지고 물은 줄어들었다. 아침마다 커피 한잔쯤은 마셔도 되지 하는 꼬드김으로 엎치락뒤치락 씨름을 한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헬스장을 빠져도 별로 불안하지 않다. 운동시간도 줄어들었다. 지금 상태로 유지만 해도 만족할 것 같은 마음으로 바뀌었다. 마침 관절염이 생겨 당분간 운동을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도 있어 죄책감을 덜어 냈다.

처음과 끝이 한결같기가 쉽지 않다. 골다공증이 다 나은 것도 아닌데 초심을 잃었다. 나는 여전히 커피 유혹에 시달리고 운동을 게을리 하고 있다. 해가 바뀐다 해도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오늘이다. 하지만 묵은 달력을 내리고 새 달력을 걸으며 다시 시작할 결심을 했다. 커피를 끊고 신발 끈을 조여 매고 숭숭 뚫린 뼛속이 꽉꽉 채워지도록 뛰어볼 참이다.

고마운 일이다. 365일이 지나면 다시 ‘처음’이 된다.

<박연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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