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해도 찜찜했던 일, 해결되지 않았던 일, 그냥 삶의 한장을 찢어서 훌훌 태워 버렸으면 하는 날들도 많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돌이킬 수 없지만 세상은 지독히도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픔이 있고 막을 수 없는 괴로움이 있다. 고통은 집요하게 지속된다.
그렇게 삶은 녹녹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우리에게 간헐적인 기쁨도 선사한다. 그런 기쁨이나 감동은 연약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지키는 지렜대처럼 균형을 지키고 있다. 휘어지려는 대나무의 매듭처럼 연약한 줄기에 단단한 힘을 불어 넣는다.
어느 마라톤 경기에서 마지막 몇 미터를 앞두고 지쳐 쓰러진 선수를 뒤에 따라 뛰어 오던 어떤 선수가 그를 어깨에 메고는 엎치락 뒤치락 힘든 발을 끌게하여 결국은 함께 마지막 선을 넘은 장면을 영상으로 본적이 있다. 사람들은 때로 자신에게 불리할 때도 타인을 위한 영웅적인 힘을 발휘한다. 사람들은 지독히 이기적이고 파괴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순적일 정도로 이타적이고 남을 위하여 제 생명까지 희생하는 숭고함도 함께 발휘한다.
세상은 이런 모순의 범벅이다. 무척 아름답기도 하지만 동시에 잔인함도 함께한다. 세계적으로 지속되는 전쟁과 죽음, 고난과 아픔, 가까운 가족들의 생사를 넘나드는 지병, 사기를 당해 고통받는 지인들, 억울한 사정으로 시비를 가르기 위해 법정에 서야 했던 사람들, 다음날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 불치병으로 가슴을 태우는 사람들, 한번 태어난 생명을 주어진 죽음에 고스란히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온갖 힘을 다해 버티며 살아간다. 행복하다는 사람들도 그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고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도 그 나름대로 햇볕이 들 때가 있다.
그날이 그날 같은 지루함의 반복이 있어도 결코 같은 날은 없다. 오늘은 어제와 다른 곳에 와있다.
그리스 신화에 평생을 큰 바윗돌을 산 위로 밀어 올리는 힘겨운 고통의 나날을 살아야 하는 시지프스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어제와 다른 오늘이 주는 신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살아야 하는 용기이다.
새해를 맞는 각오가 작심삼일로 끝나 버린다고 해도 삶이 실패작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삶은 보장할 수 없는 결과이기 보다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마음먹은 결심이 꼭 이루어져 성공했다고 행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완성했다고 하는 짜릿한 순간은 매우 짧다. 그러나 거기까지 버티고 온 삶의 길은 너무도 멀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그믐날 밤 나와 남편은 식품점에 잠간 들러 몇가지 채소 등을 집어 들고 카운터 앞에 섰다. 돈을 내려고 지갑을 열었을 때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뒤에 계시는 분이 함께 지불하겠다고 했으니 그냥 가도 된다고 했다. 믿기지 않아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둘러 보았다. 온종일 작업을 하고 작업복도 갈아 입지 않은 얼굴에 피곤기가 서려있는 청년이 웃으며 서 있었다. “Happy New Year” 하면서 그냥 드리는 선물이라고 했다. 땀흘려 힘들게 일해서 번 돈으로 이유없이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는 아름다움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숙연히 정신을 가다듬어 나도 새해엔 어느 낯선 사람이 이유없이 내게 베푼 아름다움처럼 나도 예쁜 세상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작심삼일이 된다 하여도 후회하지 않는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시작된다. 조금씩 아주 천천한 걸음으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라도 아름다운 세상 만들어 가는데 동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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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순 인디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