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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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셔에서] 연말의 산책길에서

2024-12-26 (목) 12:00:00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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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달이다.

한 장씩 넘기는 달력에 뒷장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무엇인가 놓친 것만 같은 불안감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시간을 낭비했다는 자책마저 든다. 무엇을 놓쳤는가 세밀히 살펴보려 하지만 딱히 그 실체는 발견하지 못한다. 매일 같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반복하는 하루다. 어찌 보면 같은 날인데 ‘마지막 달’과 ‘새해 첫날’은 전혀 다른 의미로 우리의 삶에 들어온다.

마지막 마음이 울적해진다.


기분을 바꿔보려고 일어나 밖으로 나온다. 추운 날씨에도 산책길에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뒤에서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젊은 남녀 서너 명이 달려오고 있다. 길을 비켜주자 고맙다는 눈인사를 하며 지나쳐 간다. 운동으로 다져진 아름다운 몸매에서 싱그러운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 젊음을 오래 바라본다.

매서운 바람이 살갗을 때린다. 잠바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쓴다. 빠끔히 눈만 내놓고 걷는데 벌거벗은 나무가 보인다. 몇 달 전만 해도 무성한 잎들이 넉넉한 그늘을 드리웠었는데, 맨살을 고스란히 드러낸 나뭇가지들이 하늘로 향해 두 팔 벌리고 있다. 춥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무언가 기원하는 모습이다.

나무에 손을 대면 새 생명을 준비하는 수맥의 바쁜 움직임이 느껴질 것만 같다. 추위에도 움츠리지 않고 뿌리를 더 멀리 뻗고 있을 나무 앞에서 나의 조급함이 부끄러워진다.

아차! 나무에 정신이 팔려 파인 길에 고인 흙탕물을 피하지 못했다. 밤새 얼었다 아침 햇살에 녹았는지 젖은 운동화 앞면에 얼음 가루가 묻어 있다. 발끝이 시려온다. 되돌아가려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도 만만치 않다.

발가락을 꼼지락 생각해 보면 참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온 이민 생활이다.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대체로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처음 실패에 부딪혔을 때, 그 절망감에 세상이 끝난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른 길이라도, 천천히라도 다시 일어나 걸어야 했다.

다다르지 못해도 괜찮다는 것을 배워나갔다. 그어 놓은 선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견디지 못하던 나의 성향도 많이 누그러졌다. 오히려 ‘그럴 수도 있지.’ 하며 한발 물러나 토닥일 줄도 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젖은 운동화는 어느 사이 말라 있었다. 책상 앞에 앉으니 한 장 달랑 남은 달력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몇 시간 전의 조급함과 우울함은 없다. 마치 새해 첫날인 양 새롭기까지 하다. 시간은 삶의 굴곡에 상관없이 묵묵히 흘러 저무는 한 해의 끄트머리에 서 있다. 2025년에는 어떤 일들이 나의 삶에서 일어날까? 두려움보다는 기대하는 마음이 더 크다. 흐트러진 책상을 정리하며 지나간 날들에 묻어 있는 미련이나 후회들을 툭툭 털어 낸다.

<허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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