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세탁 에피소드

2024-09-06 (금) 문일룡 변호사, VA 페어팩스카운티 교육위원
크게 작게
최근 두 주간 고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이번 여행 중 오천 원이라는 거금을 처절하게 지키는 대견한 경험을 했다.

고국 방문을 여름에 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예전에 아이들이 어렸을 때 고국방문은 항상 애들의 여름 방학 기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란 이후에는 굳이 여름에 방문할 필요도, 기회도 없었다. 사실 여름에는 덥고 비행기표 값도 더 비쌌다. 그렇지만 이번 방문은 고국 정부 초청 행사 참여가 주 목적이었기에 시기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날씨가 무척 더웠다. 역대 최대의 폭염이라고도 했다. 서울에서 8월 한 달 동안 최저 기온이 섭씨 25도 이하로 내려간 날이 단 5일 정도였다고 했다. 더위에 약한 나는 정말 힘들었다. 두 주 동안 흘린 땀은 연중 내내 흘린 땀에 버금갔다. 외부에서 잠깐 일을 보고 와도 옷이 흠뻑 땀에 젖었다. 티셔츠 5장을 가져갔지만 금방 부족해져 세탁을 해야 했다. 그래서 고국 방문 중 처음으로 호텔에서 세탁을 해보게 되었다.

머물던 호텔 22층에 세탁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유료일 것 같아 현금을 챙겨 올라갔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긴장되었다. 세탁실에 붙여 있는 설명문을 읽어보니 세제를 기계에서 구매하라고 했다. 한 번 사용할 분량에 천 원이었고, 오백 원짜리 동전을 두 개 넣어야 했다. 동전을 바꿔주는 기계에 천 원짜리 지폐를 넣고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받았다. 그 동전들을 세제 판매 기계에 넣어 세제 한 봉지를 성공적으로 구했다. 세제 판매기가 왜 지폐를 받지 않는지 궁금했다.


이제 세탁기 사용 방법을 알아야 했다. 설명문을 찬찬히 읽었다. 세탁물을 세탁기에 넣고, 세제도 제대로 넣었다. 사용료는 오천 원이었다. 천 원짜리 지폐 5장을 넣어야 했다. 다행히도 주머니에 5장이 있었다. 돈을 모두 넣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세탁기가 작동하지 않았다. 뭐가 잘못된 걸까? 사용 설명을 다시 읽어보았고, 전원을 확인했지만 문제가 없어 보였다. 세탁실에 아무도 없어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다.

그때 자세히 보니, 내가 돈을 건조기에 넣었던 것이다. 세탁기는 건조기 아래에 있었는데, 옷은 세탁기에, 돈은 건조기에 넣은 것이었다. 어휴, 쪽팔려. 다행히 주변에 아무도 없어 조금 안심이 되었다. 주머니에 천 원짜리 지폐는 더 이상 없었다. 만원짜리 바꾸어 주는 기계도 없었다. 호텔 1층 프론트로 가야 했다. 빨리 다녀와야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22층까지 뛰어 내려갔다. 누가 내가 돈을 넣어둔 건조기를 사용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프론트에서 만원짜리 지폐를 바꿔달라고 하며, 건조기에 돈을 넣었다고 설명했다. 혹시 5천원을 주지 않을까 살짝 기대해 보았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미소뿐이었다. 젠장. 이제 다시 22층으로 가야 했다. 아까보다 더 열심히 엘리베이터에서 달렸다. 세탁실에 도착하니, 건조기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다행이다.

이제 제대로 세탁기에 돈을 넣고 시작 버튼을 누르니 세탁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성공이었다. 그런데 세탁이 38분이나 걸린다고 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가장 큰 문제는, 그 38분 동안 내 방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내가 돈을 넣어둔 건조기를 사용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오천원을 지켜야 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38분을 건조기 앞에서 버티기로 했다. 작은 세탁실 안에는 의자 하나 없었다.

그렇게 나는 4달러도 안 되는 돈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건조기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연습했다. 다른 사람이 들어와 내 건조기를 사용하려 하면 왜 먼저 나에게 오천 원을 지불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정연한 연설을. 그러나 38분 동안 세탁실에 방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쪼잔할 수도 있지만, 나도 오천 원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가슴이 뿌듯했다. 세탁된 옷들을 챙겨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방 하나를 열어 보았다. 어, 그랬더니 거기에 벗어 놓은 빨래감들이 더 있었다. 어쩐지 세탁물 양이 적어 보이더라. 그 빨래감들 세탁은 포기했다. 갑자기 머리 속도 더워졌다.

<문일룡 변호사, VA 페어팩스카운티 교육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