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목요일 아침에] 여우의 간지, 사자의 용맹

2024-09-05 (목) 고광본 서울경제 논설위원·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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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의 정치사상가인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나라가 분열돼 대립하던 시대를 살았다. 옛 로마제국의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군주국·공화국·신정(교황청) 체제 등 5개국으로 나뉘어 싸웠고 프랑스 등의 외침에도 시달렸다. 그는 피렌체대에서 인문학을 전공하고 1498년 불과 29세에 피렌체의 제2장관직에 올랐다. 교황청·프랑스 등에서 대사로 활동하며 국제사회의 냉혹함을 목도하고 지도자들의 통치술을 관찰했다.

잘나가던 그의 운명은 피렌체가 1512년 교황·스페인 동맹 대 프랑스 간 전쟁 때 프랑스 편에 섰다가 스페인군에 함락당하며 추락한다. 재집권한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고문을 받고 시골에 칩거한다. 이때 전술론, 군주론, 로마사 논고, 피렌체사 등을 썼는데 이 중 메디치가의 지도자인 로렌초 데메디치에 헌정한 군주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이 책은 당시에는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오랫동안 금서로 묶였다가 18세기부터 근대 민주주의·공화주의와 맥이 닿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다가 20세기 히틀러와 무솔리니 등이 군주론에 열광하는 바람에 마키아벨리즘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오해에 시달린다. 하지만 현대 들어 정치 권력의 본질을 꿰뚫으며 국가의 성공을 위한 리더십과 처세술·전략 등에서 심오한 통찰을 제시한 것으로 다시 인정 받는다.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는 포르투나(운명)를 극복할 비르투(역량)를 강조하며 ‘여우의 간지(奸智)와 사자의 용맹(勇猛)’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국의 번영과 통일을 염원한 그는 중세의 질서에서 탈피해 정치를 도덕과 종교로부터 분리해 현실을 직시하며 전략적 사고와 실용주의를 펴야 한다고 했다. 지도자가 국민에 두려움을 주는 것은 좋지만 미움과 경멸을 받으면 안 되고 참모가 진언할 때 화를 내지 않아야 아첨꾼을 피할 수 있다는 조언도 했다. 군주론을 보면서 우리 국가 리더십이 글로벌 복합 위기를 헤쳐갈 혁신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지금 기술 패권 및 공급망 분리, 복잡다단한 지정학, 저성장·양극화, 저출생·고령화, 지방 소멸, 기후위기, 남북 관계 등 거대한 시험대에 직면해 있다. 의료·부채·부동산 등 산적한 현안에다 노동·연금·교육 등 구조 개혁, 연구개발(R&D)·벤처스타트업 혁신 생태계 구축 등 국가적 과제도 많다. 얽히고 설킨 고차방정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20%대 초반까지 국정 지지도가 떨어지고 야당과도 소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법을 잘 찾아갈 수 있을지 우려하는 시각이 많다.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의 포용적 리더십을 논하지 않더라도 리더십은 소통에서 나온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역시 ‘더 유능한 수권정당’을 표방하고 있으나 마키아벨리가 얘기한 국가 지도자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 의문이다.

결국은 대통령실을 비롯해 여야정 모두 여우의 간지와 사자의 용맹을 갖춘 실용주의 리더십을 세우기 위한 패러다임 대전환이 요구된다. 그런 면에서 현 정권이 역사 논쟁에 휘말리게 된 단초를 제공한 것은 미숙한 국정운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제가 확실히 살아나고 비상 진료 체계가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는 대통령의 말도 아첨꾼의 보고에 기인한 것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국가 지도자들이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예스맨’이 아니라 당 태종을 보좌했던 위징 같은 ‘양신(良臣)’을 곁에 둬야 한다.

지도자는 운명의 바람과 물결의 전환에 따라 방향을 변경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게 마키아벨리의 조언이다. 운이 좋고 나쁘고는 시대 변화에 맞춰 역량을 갖춰 과감하게 행동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시대정신에 맞춰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근대화·산업화를 달성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을 내세워 민주화·정보화의 초석을 닦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리더십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선진국 도약과 한류 확산이라는 엄청난 저력을 보여줬지만 과연 정치·행정·사법·경제·사회 등 국가 혁신 리더십이 가동되고 있는지 곱씹어볼 때다.

<고광본 서울경제 논설위원·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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