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포커스] ‘서울대 맘’ 스티커 논란의 교훈
2024-08-29 (목)
김흥록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뉴욕 맨해튼에 있는 컬럼비아대의 서점에 가면 다양한 기념품이 있다. 그중에 컬럼비아 맘, 컬럼비아 대디 티셔츠·모자가 눈길을 잡는다. 재학생뿐 아니라 부모도 대학 기념품을 통해 자부심을 표현한다. 하버드·프린스턴 등 동부 명문대를 일컫는 7개 아이비리그 대학 대부분 이런 기념품이 있다. 그랜드맘이나 그랜드대디 기념품도 있으니 명문대 학생을 둔 가족이라는 사실은 3대의 자랑인 듯싶다. 심지어 아이비리그 진학을 꿈꾸는 고등학생을 위한 ‘2027학년도 프린스턴대 학생’ 같은 컵도 나온다. 재학생이나 가족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이 자연스럽게 기념품을 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자연스러운 명문대 기념품 문화가 한국에서는 사뭇 다른 반응으로 나타났다. 서울대 발전 재단이 기념품으로 ‘서울대 맘’ 스티커를 제작하자 “천박한 학벌주의”라는 논란이 불거졌다. 미국에서는 가족의 자부심, 학생들의 꿈으로 받아 들여지는 일을 한국에서는 천박함으로 보는 이가 적지 않다.
두 나라의 상반된 반응은 미국인의 심성이 더 관대하거나 미국에 학벌주의가 없어서가 아니다. 명문대에 진학하고자 하는 열망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고, 명문대 출신이 월가·로펌 등 성공적인 직장으로 꼽히는 곳에 취업하기 유리하다는 점도 비슷하다. 서울대 맘 스티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학벌주의 자체보다 명문대 입학 과정에 대한 사회 전반의 부정적인 시선에서 왔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미국의 입시도 특정 인종과 부유층에 유리한 구조지만 미국의 대학은 오래전부터 인종과 지역·소득별로 기회를 배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지난해 대학의 인종별 배분 정책인 ‘어퍼머티브액션’이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 논의도 활발하다. 특히 최근에는 하버드 등 일부 명문대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동문 자녀 입학 가점에 대한 검토가 진행 중이다.
이와 달리 한국의 명문대, 인기 학과는 특정 지역 출신이 주류를 차지해가는 분위기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한 해에 10명가량의 서울대 합격생을 배출하는 지방의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가 적지 않았다. 당시 명문대에 진학하면 동네 사람들이 플래카드를 걸어주기도 했던 것을 보면 오히려 한 세대 이전의 우리 모습이 현재 미국의 모습과 닮았다.
지금은 개천에서 용 나는 경우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올해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입학생 1만 3,141명 가운데 서울 지역 고교 출신이 32%를 차지했다는 통계나 2022년 전국 의대 정시 등록자 가운데 ‘강남3구’ 출신이 22.7%에 달했다는 통계는 특정 지역, 특정 계층에 기회가 편중된 대한민국 교육의 민낯을 보여주는 듯해 뒷맛이 씁쓸하다. 미국은 느리지만 불공정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대학의 주된 의제인 반면 우리는 빠른 속도로 기회가 쏠리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심화하는 쏠림과 기회의 독점에 대한 대중적 반응이 ‘서울대 맘’ 스티커 논란으로 드러난 셈이다.
미국에서 자연스럽게 ‘프린스턴 할머니’ 티셔츠를 입고 다닐 수 있는 이유를 찾는다면 아이비리그 졸업생이 아니어도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월마트의 지점장은 최대 47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데 주로 고졸 출신 매장 직원들이 경력을 쌓아 올라가는 자리다. 코스트코도 마찬가지다. 올해부터 최고경영자(CEO)를 맡은 론 바크리스 CEO는 매장 지게차 운전 직원 출신이다. 명문대에 입학하든 그렇지 않든 저마다의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는 수많은 선례가 있다. 계층 상향은 어렵고 명문대 출신조차 취업 전선에서 뒤처지면 낙오자가 되는 국내와는 사뭇 다르다.
명문대 진학은 학생의 노력, 가족의 헌신을 통해 얻은 결과인 만큼 축복받는 게 마땅하다. 그럼에도 논란이 따른다는 것은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신호다. 더 늦기 전에 교육 시스템 전반을 뜯어고쳐야 다음 세대가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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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록 서울경제 뉴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