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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 테리와 드레퓌스

2024-07-29 (월) 이기훈 워싱턴 평통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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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숙적인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패배로 끝나 수도 파리가 점령을 당하고 당시 국민소득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50억 프랑을 배상금으로 물어야 했던 프랑스의 여론은 들끓어 올랐다. 갚는데 적어도 5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우리가 외환위기에서 금 모으기를 했듯이 자존심 강한 프랑스는 국민들의 모금을 통해 이 엄청난 배상금을 단지 1년 8개월만에 갚았다.

세계 대제국이었던 프랑스는 수치스러운 패배를 당한 원인을 누군가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1891년 9월, 주프랑스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한 장의 편지가 입수되었는데 편지 안에는 프랑스 육군의 기밀문서가 들어 있었고 군 정보국은 조사 끝에 필체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육군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지목하였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대단히 유능해서 동기들에게 시기를 사고 있었고, 고지식한 성격 탓에 주위에서 미운 털이 박혀 있었다. 반유대주의에 물든 군 상층부는 희박한 증거만으로 드레퓌스 대위를 범인으로 단정해서 1894년 만장일치로 드레퓌스에게 반역죄로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드레퓌스는 1895년 영화 빠삐용에 등장하는 남미 가이아나에 있는 악마의 섬에 유배당했다.


1897년에 진범이 구속되었으나 군부는 신뢰 추락을 이유로 사건을 은폐하고 증거조작 후 진범을 풀어주었다. 이 사건을 자세히 알아본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 라는 글을 신문에 게재하며 드레퓌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던 재판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구명운동에 나섰다. 1906년 7월 우여곡절을 통해 최고재판소는 당시 군법회의의 유죄 판결을 오판으로 파기해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복권시켰다. 이 사건은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인권유린, 간첩조작사건이었다.

미 수사국의 수미 테리 기소는 여러모로 드레퓌스 사건을 연상케 한다. 미 수사당국은 수미 테리가 간첩죄가 아니라 외국대리인등록법(Foreign Agents Registration Act: FARA)에 등록하지 않고 외국 대리인으로 활동했다고 기소했다. 하지만 이는 수미 테리가 한국의 대리인으로 활동한 적이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타당하지 않은 기소였다. 그녀는 CIA에서 2001년부터 2008년까지 근무했고 2008년부터 2009년에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 하에서 국가안보회의의 국장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후 그녀는 15년간 민간에서 활동하며 연구원이자 기고자, 방송인으로서 국제전략연구소(CSIS), 윌슨센터, 미국외교협회(CFR) 등 유명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한국과 미국의 방송과 언론의 고정 출연자로 활동해 왔다.

외국 대리인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그녀의 독립적이고 학자적인 연구에 대한 모독이다. 수미 테리는 그동안 한국정부를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소신으로 학자의 입장에서 한미관계의 발전과 남북통일에 대한 연구와 발표를 해 왔다. 한국과 미국의 정책이 북한의 소수 지도층이 아니라 2천 5백만 북한 동포를 위한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서 당시 문재인 정권의 인사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최근 다큐멘터리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의 제작을 통해 북한내 인권 탄압을 알리고 탈북자를 위한 계몽에도 앞장서 왔다.
한반도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한국 정부 관계자들과 가깝게 지낸 건 맞는 사실이다. 한국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해서는 정보기관의 관계자들과 접촉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CIA나 국가안보회의에서 취득한 비밀을 건넨다거나 한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소신까지 바꿔가면서 글을 쓰거나 발언한 적은 없다고 한다. 만약 그랬다면 미 수사국의 기소가 간첩죄로 되어야 했을 것이다.

드레퓌스는 5년간 악마의 섬에서 혹독한 복역기간 동안 24시간 내내 감시를 받았고 밤에는 쇠사슬을 차야 했으며 적도의 무더위와 싸우며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아 병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1906년 복권 이후 계급장을 돌려받고 소령으로 승진함은 물론, 군인으로서 최고의 명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하고 일반 군인들처럼 생활하다가 1918년 중령으로 전역했고, 1935년에 지병으로 별세했다. 사망 이후 그는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미국의 사법체계상 미 수사국의 기소로 인한 재판은 수년이 걸릴 수 있다. 피고인 또는 피의자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한 무죄로 간주한다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지만 미 수사당국에 기소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현재 수미 테리는 근무하고 있는 연구소에서 해직당하고 언론기관에서 자신의 연구를 발표할 기회를 잃었다. 앞으로 법적인 절차를 밟기 위해 변호사 고용을 포함해 많은 자금과 이웃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지난 20여년간 한미관계의 증진과 남북통일에 대한 연구결과가 통일시대에 중요한 자산으로 사용될 것이고 이를 위해 한국 정부와 워싱턴 동포사회의 지원이 절실하다. 드레퓌스의 경우와 같이 수미 테리의 무죄가 증명되어 그녀의 한국과 미국에 대한 애국심 그리고 북한주민에 대한 연민이 남북통일이 임박한 가까운 미래에 크게 쓰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기훈 워싱턴 평통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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