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7부작 ‘베이비 레인디어’
▶ 희극에 담은 인생의 페이소스
도니(왼쪽)는 선술집을 찾은 마사에게 친절을 베풀게 되고 둘은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넷플릭스 제공]
한 여자가 선술집에 들어온다. 추레한 옷차림에 쓸쓸한 표정이다. 연민을 부를 만한 외모다. 직원 도니(리처드 개드)가 뭐 시킬지 묻자 돈이 없다고 한다. 도니는 “제가 내겠다”며 차 한 잔을 산다. 여자 마사(제시카 거닝)의 텅 빈 눈에 빛이 들어온다. 갑자기 수다스러워진다. 자신은 변호사이고, 영국 정계 유력인사들과 막역하게 지낸다며 피처폰의 전화번호 목록을 보여준다. 잘나가는 변호사라는데, 차 한 잔 마실 돈도 없다니. 힘 있는 사람들과 친하다면서 낡은 피처폰을 사용하다니. 의문이 이어지나 도니는 그저 스쳐가는 인연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하루를 보낸다.
다음 날부터 마사는 단골손님이 된다. 도니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하루 종일 선술집에 앉아 있는다. 도니는 다른 손님들에게처럼 마사를 친절과 미소로 대한다. 도니가 웃으면 마사의 얼굴에 행복감이 퍼진다. 도니는 그런 마사가 딱히 싫지 않다. 마사가 이메일 폭탄을 보내자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깨닫는다. 도니에게 악몽 같은 일이 시작된다.
도니는 딱히 잘못한 게 없다. 야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마사를 허물없이 대한 게 문제라면 문제. 그렇다고 도니가 스토킹 피해자가 될 이유는 없다.
도니는 코미디언 지망생이다.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 오르며 미래를 꿈꾼다. 빛이 보이진 않는다. 자신이 웃기는 재주가 있는지도 잘 모른다.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도니에게 마사는 진통제 같은 존재였는지 모른다. 결국엔 더 큰 인생의 통증을 안겨주게 되지만.
도니와 마사의 사연은 많은 웃음을 부른다. 마사는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보낸 이메일 끝에는 ‘아이폰에서 전송된(Sent from iPhone)’이란 문구가 달려 있다. 시청자들은 문구의 비밀을 알고 큭큭거리게 될 듯하다. 마사의 기행이 이어지면서 화면에 넘쳐 나던 웃음은 공포로 전환된다.
드라마는 단순히 스토킹에만 이야기를 집중하지 않는다. 도니의 과거와 상처를 돌아본다. 도니는 얼마 전 믿기 힘든 일을 겪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할 사건으로 도니의 삶에 길고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도니가 값싼 동정심에 마사에게 차 한 잔을 건넨 건 아니다. 마사에게서 자신을 발견해서일지 모른다.
도니가 마사의 스토킹을 극복해 가는 과정은 과거의 아픔을 치유해 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마사의 스토킹이 있었기에 오랫동안 데면데면한 사이였던 아버지와 마음을 트기도 한다. 도니와 마사의 사연을 들여다보면 삶을 관통하는 페이소스를 느끼게 된다.
주연배우 리처드 개드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개드가 2016년 에든버러프린지페스티벌에서 소개했던 1인극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제목은 마사가 도니를 부르는 호칭(레인디어는 순록을 의미)이다. 웃음이 지배하던 화면은 개드의 과거로 돌아가면서 돌변한다. 개드가 겪은 사건은 끔찍하다. 보는 이가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 묘사된다.
‘베이비 레인디어’는 단순히 웃음과 공포만을 전하지 않는다. 우리 삶에 깃들어 있는 슬픔과 욕망, 연민까지 들춰낸다. 도니는 마지막 장면에서 마사처럼 선술집에 홀로 앉는다. 마사의 심정을 깨닫는다. 세상에 절대 악인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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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 영화전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