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산비탈에 스테이 짓고 여행하듯 삽니다”…전원살기 도전기

2024-05-22 (수)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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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면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에서 떨어져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며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해요.”

아이를 키우는 도시 생활자 부부는 40대 시작을 목전에 두고 일생일대 도전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바쁜 남편은 늦기 전에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길 바랐고 쳇바퀴 같은 육아에 질린 아내는 건강한 자극을 원했다. 그로부터 3년 뒤 이들은 숙소를 겸한 전원주택을 짓고 하루하루 '스테이'(소형 숙박시설)에 머무르듯 여행하는 기분으로 산다. 경기 양평 양지바른 산자락에 가족의 보금자리이자 숙소인 두 채의 집(대지면적 1,526㎡, 연면적 229.77㎡)을 지은 현효상(42) 윤재은(41) 부부 얘기다.

원래도 멋진 숙소를 찾아 여행하는 걸 좋아한 부부가 인생의 진로를 바꿔 집과 스테이를 지은 건 우연이 아니었다. 틈만 나면 아들 승민(7)군과 산과 바다로 여행을 다니면서 살고 싶은 숙소를 눈여겨봤다. 그중 하나가 안광일 박솔하 건축디자이너(백에이어소시에이츠 소장)가 만든 스테이였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학군지로 이사를 갈 것인지, 아예 도시를 벗어나 전원살이를 시작해 볼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죠. 그러다 소담한 집을 지어 시골에 살면서 삶의 수단으로 스테이를 운영해 보자고 결론이 났어요."


2년 동안 서울 근교의 땅을 보러 다닌 부부는 아름다운 자연과 편의시설을 누릴 수 있는 양평에서 마음에 드는 대지를 만났다. 지대가 높아 남쪽으로 펼쳐진 산이 훤히 내려다보일 만큼 전망이 뛰어난 데다 동네 분위기도 안온해서 본 순간 “여기다!" 했다고. 일찌감치 부부의 낙점을 받은 안광일 소장도 대지로부터 좋은 인상을 받기는 마찬가지. “나무로 빼곡하게 찬 길을 올라갈 때부터 좋았어요. 한참 올라가니 그야말로 시야가 숲으로만 채워지는데, 그 자체가 주는 충만함이 마음에 들었죠. 사는 사람에게도, 찾아오는 사람에게도 만족스러운 집이 나오겠다 싶었어요."

■'18도' 산비탈을 살리다

대지의 고저 차이가 20m, 경사가 18도에 달하는 산비탈이기에 무엇보다 공간의 시선을 맞추는 일이 주효했다. 위아래로 긴 대지를 오가며 최적의 시야를 찾았다.

안 소장은 “기본적으로 산을 깎아서 만든 경사지였기 때문에 각 건물과 마당의 위치를 세심하게 조율하는 작업이 필요했다"며 “전체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상단에 살림집을 앉히고 스테이를 그 아래에 배치하되 건물 사이의 비탈을 그대로 살려 정원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살림집인 본채가 밖에서 보면 2층으로 보이는 것도 지형을 살리기 위한 일환이었다.

세 식구가 사는 살림집은 가장 좋은 전망을 누린다. 안 소장은 자연 전망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주방부터 다이닝룸, 거실과 방을 나란히 앉히되, 모든 공간에서 앞산을 파노라마뷰로 감상할 수 있도록 긴 창을 들였다. “자연 풍경이 압권인 집이니 배치는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요. 다만 공간마다 다른 모습이 담기고, 사람이 움직이면서 다시 하나의 풍경으로 이어지도록 신경을 썼어요."

■필요에 따라 열고 닫히는 공간

경사진 땅모양에 맞춰 앉은 두 채의 집은 안팎이 단정하다. 건물 외관은 눈에 띄는 장식 없이 노출 짙은 회색톤 콘크리트로 마감했고, 정원은 붉게 녹이 슨 듯한 코르텐 강판으로 꾸며 현대적이면서도 소박한 분위기를 냈다. 내부 역시 흰색 페인트와 나무 마감을 기본으로 단순하게 구성하되 모든 공간에 슬라이딩 도어를 달았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며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한 결과물이다.


남편 현씨는 “직장과 가정에서 각자 일과를 보내던 과거와 달리 거의 모든 시간을 한 집에서 보내게 되면서 독립적인 공간이 필요했다"며 “살림 공간과 작업 공간, 휴식 공간이 목적에 따라 분리됐으면 했고, 원하던 대로 구현됐다"고 만족해했다.

일과 가족을 숨바꼭질하듯 오가며 균형을 익히고 있다는 가족. 남편은 데스크가 있는 안방에서, 아내는 다이닝룸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아이는 그 모든 공간에서 뛰놀며 아파트에서 누려본 적 없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살림집과 정원을 사이에 두고 있는 스테이 역시 소담한 모양새다. 본채가 종일 남향 빛을 받고 서 있는 형태라면 숙소 건물은 북쪽으로 큰 창을 내고 앉은 집이다. 이런 이유로 스테이는 개방감은 덜하지만 종일 잔잔한 빛이 흘러 들어오고, 나왕 합판을 두른 나무 동굴처럼 온화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감돈다.

이 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정원이다. 땅의 경사를 살리다보니 단차가 다양한 마당이 계단을 따라 흘러든다. 덕분에 공간이 더 입체적으로 보이고 움직이면서 느껴지는 감각적인 재미도 있다. 땅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정원은 에너지가 넘치는 남자 아이를 키우는 부부에게 큰 선물이라고. “네모 반듯하고 평평한 아파트 단지에서 경험해 본 적 없는 공간이잖아요. 도시에 살 때는 산책하는 것도 잘 안 됐는데 지금은 저절로 나와요. 원래는 구석에 온실을 만들 생각이었는데 단순하게 비우니 공간에도 여유가 생겨 좋아요."

■가장자리가 주는 즐거움

부부는 곧 문을 열 스테이 공간에 ‘오오르트(oort)'라는 이름을 붙였다. 네덜란드어 오오르트에는 ‘장소', ‘가장자리', ‘끝'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보통 가장자리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잖아요. 그러니 모두 중앙에 있고 싶어 하죠. 실은 가장자리에 서면 시야도 넓어지고 놓쳤던 것들을 바라볼 수 있어요. 내면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에서 떨어져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며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해요."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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