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만사] 기미년 만세운동

2024-03-05 (화)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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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己未年)은 1919년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통치할 때이다. 조선의 전 국민이 비밀리에 3월1일을 기하여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기로 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품에 숨기고 일제히 나섰다.

일본 헌병대가 이런 대대적인 거사를 눈치조차 채지 못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날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는데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은 목숨을 내놓은 용감한 일이었다. 서명자 중 16명이 기독교인이다. 그 당시 기독교인은 조선인구의 1.5%로 겨우 26만 명이었다.

사학자 이만열 교수에 의하면 그 당시 만세운동이 약 1,400군데에서 일어났는데 사건 내용이 사료에 남은 곳은 323 지역이다. 그 중 78지역이 기독교가 주동이 되어 일으켰으며. 천도교(天道敎) 중심이 66곳. 기독교와 천도교가 합동으로 일어난 지역이 42곳이었다.


그 당시 조선의 기독교는 교인들에게 구원받고 천당 갈 것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싸울 것도 가르친 진보적인 종교였음을 알 수 있다. 보수화된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와는 선교 개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 당시 조선에서 일하던 선교사들이 선교 본부에 보낸 보고서의 내용이다. “만세운동이 허리케인처럼 전국을 휩쓸고 있다. 예배 성경 공부 등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왜냐하면 목사, 전도사, 장로들의 대부분이 감옥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Chosun Mission Report 1919)

어린 여학생들이 감옥에 갇혀 십자가에 알몸으로 매달려 인두와 칼로 고문당한 수기가 생생하게 남아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사) 그 여학생들은 자유와 독립을 외치며 욕을 당하고 죽어간 것이다.

신앙의 힘이 아니고는 견딜 수 없는 고난이었다. 조선에 들어온 예수 바람은 곧 새바람, 개화의 바람, 자유의 바람이었던 것이다. 오랜 쇄국주의를 타파하고 세계를 향하여 문을 열고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전국민에게 보급한 것이 기독교였다.

한글 보급에도 교회는 큰 역할을 하였다. 성경 찬송 사경회를 통하여 한글 보급을 열심히 하였다. 교회는 신식 교육기관을 도처에 세웠는데 1910년에는 이미 800개의 신교육 기관을 교회가 세웠고 여기에서 처음으로 물리, 화학, 수학, 창가, 스포츠, 정치, 경제, 법률과 독립국가를 지향한 군사훈련까지 가르쳤다.

함석헌씨는 ”양반의 학정 밑에서 마른 나무같이 되었던 나라에 봄이 온 것이다.“ 고 표현하고 있다. (뜻으로 본 한국사)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는 전도 왕국이 되었다.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외형적으로 확장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사회와 나라의 인권 함양 운동, 평화 운동 경제의 공평한 분배 운동 등 기독교가 앞장서서 할 일은 많다.

한국의 근대 정치사에서 군사 정권이 장기화될 때 한국 가톨릭 교회가 군사정치의 종식과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하여 많은 핍박을 받으며 강력하게 저항한 것은 오랜만에 교회가 보인 정의 운동으로 그 때 국민의 교회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보수집단이라는 교회에 대한 과거의 묵은 생각이 사회와 나라를 위한 집단이라는 인식으로 변한 것이다. 이런 교회 인식이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교회가 개인 구원을 위한 집단인가. 사회 구원도 교회의 사명에 포함되는가 하는 문제는 계속 되는 토의의 화두이다.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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