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966년 10월 육군정보학교 교수부 SIO 시절 독일어 교관이셨던 정영주 예비역 소장과 감동적인 재회를 했다. 87세의 노익장을 과시, 일산에서 인천으로 직접 운전을 하시고 내려오셨다.
전략정보학과 영어계 조교로 옆자리에 있었던 나를 아껴주고 격려해 주셨을 뿐 아니라 복무기간 1년여를 남기고 잘 근무하고 있는 나를 파월장병으로 참전하는 미군 수송선에 오르게 한 특별한 인연의 장본인이다.
독일 괴테대학원으로 유학, 독문학석사를 마치고 귀국, 육사 교관으로도 근무한 경력소유자로 유엔정전위원회 한국 수석대표를 마지막으로 소장으로 예편한 육군에서도 전무후무한 인물. 반세기가 훨씬 넘는 장구한 세월을 보내면서도 서로 잊지 않고 오늘 인천 소재 하버파크호텔 뷔페 식당에서 역사적인 오찬을 즐기며 끊이지 않는 정담을 나누는 복을 누렸다.
지배인이 직접 두 어르신 재회를 경하드린다며 주문도 하지않은 와인을 따라주고 우리는 기쁨과 환희의 눈물을 글썽이며 축배의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1966년 11월 6일 맹호 6제대 병력과 함께 미해군 수송선에 몸을 싣고 7일만에 월남 나트랑에 도착, 6년간의 월남 복무, 종군 역사가 시작되었고 십자성부대 비서실, 야전사 방첩대, 미육군 제1야전사령부 G2 산하 55정보대 정보분석관/Intelligence Liaison Officer직함으로 활약하며 복무를 했다.
51년전, 1972년 12월 26일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해서 미국생활을 하게 된 게 나의 이력이고 역사다. 이때 나이 32세, 26세에 한국을 떠나 6년간의 젊음을 한국정부와 미국정부를 위해 몸을 바쳤던 자랑스러운 참전용사다.
이게 다 영주 형님 덕분(?)이다.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병원문을 모르고 지금껏 잘 살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졸필을 옮긴다.
코로나 때문에, 매년 고국방문길에 올랐던 내가 4년만에 찾은 고향 인천에서 극적으로 영주형과 상봉을 한 것이다. 한 손에는 가방을, 다른 손에는 프랑스 와인 2병이 들어있는 박스를 들고 나를 맞는 형님과 뜨거운 포옹을 했다.
호텔 팀장이 특별히 주차장 문앞에 서서 영접까지 해주는 배려가운데 소설감의 상봉이 이루어진 셈이다. 언제 우리 다시 또 만날까 하는데 구순잔치때 또 모국 방문길에 오르기로 마음을 굳혔다.
영주형! 살아 계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또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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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원/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