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이야기다. LA에서 대륙횡단에 나섰다가 동양인이라고 개스를 넣어주지 않는 바람에 콜로라도에서 차를 되돌려야 했던 때 일이니까. 그 때는 주유소가 풀 서비스로 운영됐었다.
한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백인 학생들이 한인 학생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핫 소스 한 병을 다 먹으면 10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코리언은 매운 것을 얼마나 잘 먹나 보자는 것이었다. 인종 차별적 제안이었으나 이 학생은 피하지 않았다. 오기가 생겼다. 우리에겐 ‘고추장 파워’가 있지 않은가. 핫 소스 작은 병 하나를 다 마셨다. 놀란 백인 학생들은 군말 없이 10달러를 내놓았다. 60대 후반이 된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지금 오렌지 카운티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당시 그는 핫 소스 한 병을 다 들이켠 후 거의 죽을 것 같았다고 했으나 다행히 죽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달에 벌어진 또 다른 매운 맛 챌린지는 결과가 다르다. 매운 칩 한 봉지를 한 번에 다 먹은 매사추세츠의 14살 소년이 숨졌다. 들불처럼 온라인에 퍼져 가던 청소년들의 매운 칩 도전의 비극적 결과였다. 이 소년이 먹은 것은 ‘세상에서 가장 매운 고추 두 종류’ 가 들었다는 파키(Paqui) 브랜드의 토르티야 칩. 매운 맛이 소년의 죽음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매운 음식에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매운 맛이 몸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경로를 따라가 보면, 지나치게 매운 음식을 찾아 먹는 것은 스스로 피학적인 쾌감을 경험해 보자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추 등에 함유된 매운 맛 성분인 캡사이신이 뇌에 감지되는 통로는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는 것과 같다. 맵거나 뜨거운 것을 느끼면 통증이 온다. 뇌는 이 스트레스에 대응하기 위해 엔도르핀과 도파민을 분비한다. 엔도르핀은 고통을 이기기 위해 몸 안에서 만드는 천연 진통제. 마약인 모르핀 보다 진통효과가 강하다. 도파민은 쾌락이나 만족감을 가져오는 호르몬. 매운 음식을 먹은 후 이런 신경전달물질이 나오기 시작하면 행복감이 높아진다. 맵게 먹으면 반짝 해피해지는 것이다. 통증을 통해 쾌감을 맛볼 수 있다.
미국과 영국 등 전통적으로 매운 음식이 많지 않은 나라에서 매운 맛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런 추세는 온라인을 통해 특히 젊은 층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더 강한 자극을 찾는 세태의 단면은 음식에서도 드러난다.
가장 큰 의문은 매운 음식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다. 매운 것은 건강에 해로운가? 아니면 이로운가? 명확한 답은 아직 없다. 일반화해 말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한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사에 고려해야 할 조건들이 셀 수 없게 많고 복잡하다.
지금까지 대략 공감을 얻고 있는 연구 결과는 매운 것을 먹는다고 일찍 죽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매운 것이 위궤양 원인은 아니나 위암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규명되지 않았다. 궤양성 대장염과 크론병 등 염증성 장질환이 있으면 피해야 한다는 것은 전문가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규명돼야 할 과제 중에 언뜻 떠오르는 것만 해도 비만, 다이어트, 심혈관계 질환, 암, 알츠하이머, 각종 궤양, 정신과 질환, 통증과 매운 음식과의 관계이다.
밝혀진 것 가운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동물도 인간처럼 통증이 느껴질 정도의 매운 것을 자의로 찾아 먹지는 않는다는 것. 일부러 매운 음식을 먹는 것도 인간의 특권이라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