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에는 가을이 일찍 찾아온다. 평지보다 2도 가량 낮은 기온 속에 아침 일찍 밭에 오르다 보면 살 속에 스며드는 공기가 제법 한기를 느끼기 하고 여름내 푸르렀던 나무들의 잎새는 어느새 갈색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뀌는 사이 안타깝게도 동년배의 부음이 곧잘 전해진다. 건강이 펄펄 넘치던 선배들 중에는 팔십 후반에 들어서자 병원 다니는 일이 제일 큰 일과가 되고 있다는 분들도 있다. 오늘 날의 나이 80은 어림잡아 40년 전의 60에 해당된다 하더라도 그래도 고령층인 것만은 틀림없다.
때마침 미국 정가에 고령 시비가 일고 있다. 76세인 미트 롬니 공화당 상원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하자 공은 81세인 바이든 대통령에 넘겨졌다. 바이든 대통령이 만일 내년 11월 대선에 승리할 경우 86세까지 재임하게 되는데 과연 그때까지 국정을 제대로 이끌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달 초 CNN이 주관한 한 여론조사에서는 73%의 응답자가 바이든의 나이에 부정적 여론을 보이고 있다.
밖으로 보기에 신체적 결함은 없어 보인다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문득 문득 잊어버리거나 생각나지 않는 일들이 잦아지기 마련이다. 이런 것이 노망(老妄)인데 치매와 달리 노망은 불가피한 노화현상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민주당을 지지해왔던 나도 이번에 그 73% 여론에 동조하기로 했다. 그동안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라거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우겨대는 사람들의 구호가 얼마나 허황된 욕심이며 요즘 말로 가짜뉴스인가를 주변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경쟁자인 트럼프의 77세도 고령이기는 마찬가지다.
지금 민주당의 정책에서 과거 케네디, 클린턴 시대에 있었던 포용적이며 활기찬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2년 전 바이든은 젊고 희망찬 미래로 가는 가교 역할을 하겠다며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지금과 같은 반 평화적이며 협량한 정책으로 다시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은 노망을 넘어 노탐(老貪)이다.
고령층의 노망도 민망스런 일인데 늙지도 않은 사람의 노망은 차마 목불인견이다. 노인들도 멀리하는 구시대적 사고방식과 냉전적 이념을 들고 나와 국민통합을 산산이 조각내고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몰고 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권력과 생명의 유한함을 망각하고 있는 중증의 노망이랄 수밖에 없다.
서울에서 부자들과 권력자가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광야의 음성을 전해주던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가 70도 안된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같은 시기 LA 남쪽 가든 그로브 시에서 27년 간 법보선원을 이끌며 불교의 대중화에 진력하는 한편 고통을 겪는 이웃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평화의 선도자로 평생을 지내온 정창문 법사의 아름다운 은퇴 소식도 들려온다.
여름이 지나면서 텃밭의 야채들은 끝물이 돼간다. 그 중 어느 것은 줄기와 잎사귀들이 모두 말라버려 아예 뽑아 버릴까 했더니 놀랍게도 그 줄기 아래로 아주 건강한 호박과 가지와 오이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식물에게도 저렇듯 자기를 죽이며 새로운 과실을 키우는 지혜가 있다니-. 해가 기울어 산을 내려오는데 저녁노을이 어느 때보다 황홀하고 풍성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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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