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흥진의 영화이야기 - 새 영화 ‘프리몬트’(Fremont) ★★★★½ (5개 만점)
▶ 평범해 보이지만 힘과 깊은 예지 담겨…내용과 대사·연기가 모두 매우 현실적, 인간미 가득한 이민자의 고독·꿈 다뤄
도냐와 포춘 쿠키 제조 공장 주인 릭키(오른 쪽)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포춘 쿠키 제조 공장에서 일하는 20대의 도냐(아나이타 왈리 자다)는 불면증에 시달린다. 미군이 철수하기 전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서 미군을 위해 통역사로 일하다가 가족을 남겨두고 미군 철수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죄책감과 함께 낯선 타지에서의 고독감 탓이다. 프리몬트에 살면서 샌프란시스코로 출퇴근하는 도냐의 따분하도록 평범한 일상을 검소하고 사려 깊고 또 상냥하게 그린 작은 보석과도 같은 흑백영화다.
시치미 뚝 뗀 유머를 연민의 마음에 담아 서서히 서술하고 있는데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안으로는 힘과 깊은 예지가 담긴 작품으로 내용과 대사와 연기가 모두 매우 현실적이다. 이민자의 고독과 아메리칸 드림을 다룬 인간미 가득한 영화로 그냥 내던지듯이 하는 대사가 지닌 지혜와 함께 꾸미지 않은 사실감 때문에 작품 속에 서서히 빨려 들어가다가 잔잔한 감동의 파랑을 몸 안팎으로 느끼게 된다.
도냐는 프리몬트에서 아프간난민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에 거주하지만 아침과 저녁으로 보는 주민들을 피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출퇴근한다. 도냐가 하는 일은 포춘 쿠키를 플라스틱으로 싸는 일. 도냐의 하는 일처럼 그의 얼굴 표정도 무감하기 짝이 없는데 공장 동료인 조앤나(힐다 슈멜링)등과의 관계와 함께 다른 근로자들의 인물 묘사가 재미있다.
도냐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흥미 있는 것이 난민들의 심리상담의사인 앤소니(그렉 터킹턴). 도냐는 의사에게 수면제만 좀 달라고 요구하지만 의사는 도냐의 불면증을 단순하게 보지 않고 전쟁 후유증으로 보고 자꾸 대화를 유도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 도냐가 의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우습다. 앤소니는 도냐가 대화 불통이자 자기가 좋아하는 책인 잭 런던의 ‘와이트 팽’을 읽어주면서 그 내용과 도냐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공장주인은 중국인 부부 릭키(에디 탱)와 린(제니퍼 맥케이)인데 릭키는 다정하고 친절한데 린은 도냐를 탐탁하지 않게 여긴다. 그런데 포춘 쿠키의 메시지를 쓰던 나이 먹은 여자가 사망하면서 릭키는 그 일을 도냐에게 맡긴다. “기억할 것이 있는 사람들은 글도 아름답게 쓴다”라면서. 이렇게 영화의 많은 대사들이 아름다운 지혜로 가꾸어져 있다.
자기는 별로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사는 도냐는 포춘 쿠키를 통해 모르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풍족함을 주는 셈인데 견디다 못한 도냐가 고독한 사정과 함께 자기 전화번호를 메시지로 적으면서 린이 이를 발견, 도냐가 베이커스필드를 찾아가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도냐가 베이커스필드로 가다가 들른 자동차 정비공장의 젊은 미캐닉 대니얼(제레미 알렌 와이트)과의 만남. 희망과 따스함이 봄의 온기처럼 느껴진다.
뛰어난 것은 실제로 아프간 난민으로 이 영화로 스크린에 데뷔한 왈리 자다의 표정과 연기다. 무표정 속에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을 아주 자연스럽고 소박하게 보여준다. 흑백촬영도 아름답다. 바박 잘라리 감독(공동 각본). Nuart(11272 Santa Monica)서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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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