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익어 가고 있다. 여름은 내려 쬐이는 뙤약볕 아래 이마에서 땀방울이 연신 흘러내리는 무더위인데 그 여름이 익어 간다고 하니 얼마나 더 덥다는 표현일까.
그 무더위 위에 원색의 계절이 펼쳐진다. 아주 커다란 수박을 끌어안고 손가락 끝으로 살짝 두드려가며 얼마나 잘 익었을까 하고 한껏 폼을 잡는다. 그 모습을 쳐다보며 궁금해 하는 표정과 눈동자들, 힘주어 자르니 쩍 소리를 내며 수박이 두 쪽으로 갈라진다. 까~만 씨에 기가 막히게 잘 익은 빨간 수박에 긴장감이 들 정도로 쳐다보던 그들은 야! 환호하며 얼굴이 보름달처럼 밝아지며 웃는다. 극 수박의 맛을 어찌 표현하랴! 여름이 익어간다.
뜨거운 바람이 어쩌다 한 번씩 휙휙 감도는 원두막 밑에서 참외 밭을 바라보면 아저씨는 구멍이 숭숭 뚫린 망태기를 둘러메고 노란 참외를 밭에서 따서 담는다. 생김새는 타원형에 세로로 넙적한 줄기가 죽죽 있다. 그것을 그때는 열골 참외라 불렀다.
아저씨는 그 노란 참외를 원두막 밑에 짚을 깔고 나란히 뉘여 놓는다. 그리고 큰 것으로 골라 손으로 털어 무릎 바지에 문지르더니 껍질도 벗기지 않고 쓱쓱 썰어서 한쪽씩 건네준다. 지금은 마트에서 ‘황금 싸래기’라고 불리고 있다. 지금은 황금 싸래기지만 그때 열골 참외라 불리던 참외 맛은 씹히는 식감이 아삭하고 꿀맛이다. 개나리보다도 빛이 진했던 열골 참외와 함께 여름이 익어간다.
텃밭에서는 푸른 상추가 자라 큰 손바닥만한 것들이 너풀거리고 그 두렁 뒷쪽으로 김장철에 한몫을 차지할 고추나무가 하얀 꽃을 피우며 더운 여름을 지내고 있다. 어떤 것은 고추가 손가락 만하게 달려 있다. 한 아저씨가 쳐다보며 군침을 넘기시며 고추장 듬뿍 찍어 안주해서 막걸리 한잔하면 맛있겠다고 하신다.
밭 한쪽 귀퉁이엔 키 크고 잘 생긴 옥수수가 바람결에 몸을 살짝 내젓는다. 옥수수 토생이가 제법 커지며 끝에 있는 수염이 보실보실 말라가면 옥수수 알갱이가 영글어 가는 시기이다. 며칠 후 다 영글면 따다가 가마솥에 장작불 지펴 쪄 내면 냄새와 맛이 얼마나 좋을까. 찰옥수수, 그냥 옥수수, 식구가 많아서 가마솥이 좋았다. 찐 옥수수 냄새에 여름이 영글어 간다.
울타리 밑에서 덩굴이 뻗어 올라가는 오이는 자고나면 키가 커져 옆집 담장을 넘보고 있다. 잎사귀가 하도 탐스러워 잘 보이지 않아 아낙네들은 손때가 묻은 반질반질한 부지깽이로 이리저리 잎사귀를 제쳐가며 오이를 따 들인다. 단단하고 아주 예쁜 항아리에 오이지를 담가 짭조름하고 새큼한 그리고, 시원한 여름 반찬을 만든다. 오이지 국물 한 모금에 여름이 익어간다.
수박, 참외, 옥수수, 자두, 개복숭아, 청포도, 앵두... 텃밭에 푸성귀들 빨간 토마토, 보라색 가지, 둥그런 호박. 원색의 계절에 여름이 익는다.
아주 많이 흘러가버린 세월 속에서도 여름은 익어 갔었고 현재의 이 시간 속에서도 변해버린 나의 모습과 함께 또 한해의 여름이 익어가고 있다.
내 작은 텃밭에도 발그스레한 방울 토마토가 나를 보고 웃는다. 이 여름이 익어가고 있다. 끈끈하고, 후끈하다. 여름이 익는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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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 베데스다,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