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는 TV 뉴스 보기가 겁이 났다. 도로변 산이 와르르 흙의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공포스런 장면, 동네 한 구역이 완전히 쓸려 내려가 붉은 흙더미로 바뀐 처참한 광경, 지옥이 따로 없었을 캄캄한 물속의 지하차도 … 끔찍한 뉴스가 연일 한국에서 전해졌다.
한반도 중남부 지역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곳곳에서 산이 무너지고 강이 범람했다. 한국은 또 다시 물바다가 되었다. 사망/실종자는 이미 50명을 넘어섰고, 가옥과 농경지, 축사와 비닐하우스 등 재산피해는 엄청나다. 수십년 공들여 가꿔왔을 삶의 터전들은 한순간에 초토화했고, 그 안에서 울고 웃으며 이어져왔을 소박한 삶들은 절망의 나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돌아보면 한국에서 지난 수십년 여름마다 해온 것이 수재민 돕기 성금모금이다. 지금은 열기가 좀 식었지만 미주 한인사회도 때마다 조국의 수재민을 돕자며 성금을 모으곤 했다. 모금은 여름철 연례행사였다.
그 오랜 세월 매해 빠짐없이 반복되어 왔는데도 왜 도무지 나아지지를 않는 건가. 국민소득 3만 달러의 ‘선진국’이라고 자랑하는 나라에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게 정상인가. 국민들의 삶이 찢어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데 정부는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이번 홍수와 산사태로 인한 인명피해는 2011년 이후 최대 규모이다. 12년 전 태풍과 폭우로 서울 한복판 서초구에서 산사태가 일어나는 등 피해가 컸던 당시 사망 및 실종자 수는 78명이나 되었다. 이후 기후변화와 함께 폭우의 빈도와 강도는 높아졌지만 대책이 강구되지 않으니 피해는 반복되었다. 바로 지난해, 115년 만에 가장 큰 폭우로 반지하 주택들이 물에 잠기는 등 피해가 속출하자 한국정부는 정색을 하고 폭우대비 강화를 약속했었다. 하지만 그때뿐, 다시 여름은 오고 폭우는 쏟아지고 재난은 반복되었다.
올 여름 전 세계가 자연재해로 고통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 물난리가 나기 며칠 전 인도의 뉴델리와 히말라야 인근지역, 일본의 규슈, 미국의 북동부가 줄줄이 집중호우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한쪽에서는 절절 끓는 폭염으로 숨이 막히고, 다른 쪽에서는 폭우로 인한 홍수와 산사태로 생명을 위협받는 것이 지금 지구촌의 모습이다.
미국에서 폭우가 극심했던 곳은 버몬트이다. 두 달 동안 내릴 비가 이틀 동안 쏟아지면서 계곡의 강들은 폭포로 바뀌고 주도 몬트필리어를 비롯한 많은 지역은 진흙탕 물속에 잠겼다. 집도 차도 물에 잠긴 주민들은 카누를 타고 대피하고 이동했다. 버몬트에서 이렇게 기록적 홍수가 닥친 것은 2011년 허리케인 아이린 이후 처음이다. 주도를 지나는 위누스키 강의 수위는 아이린 때보다 30cm나 더 높았다. 재산피해는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인명피해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아이린 이후 12년 동안 차근차근 대비를 해온 덕분이다.
허리케인 아이린은 버몬트 주민들에게 충격이었다. 3명이 목숨을 잃고 7억3,000만 달러 상당의 재산피해가 발생하자 주민들은 대책을 강구했다. 같은 비극을 또 당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우선 홍수 위험이 높은 습지와 범람지대의 건물/주택들을 주정부가 사들인 후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강 수위가 높아져도 견딜 수 있도록 다리들을 새로 설계하고 건축했으며, 도로나 다리 밑의 배수관들을 대용량으로 교체해 물이 불어나도 잘 빠지게 했다. 기상이변들에 대비해 기반시설들을 교체하는 작업이고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자연재해를 피해갈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어느 나라에나 닥칠 수 있다. 하지만 피해가 같지는 않다. 지난 198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규모 7.0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사망자는 63명이었다. 2010년 아이티에서 같은 규모의 강진이 발생했을 때 사망자는 22만명이었다. 건물과 교량들을 지진대비 건축공법으로 짓고 비상사태에 대비한 대처 시스템을 잘 갖춰 놓은 미국은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한마디로 미국은 선진국이고 아이티는 후진국이다. 선진/후진국의 차이는 잘 먹고 잘 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결정적인 순간 국민들의 생사를 가른다.
대한민국은 2021년 공식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2년 전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개발도상국 그룹에 속하던 한국을 선진국 그룹으로 이동시켰다고 발표했다. 선진국을 가르는 기준은 일단 경제력이다. 기술적으로 앞서고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선진국으로 분류, 일인당 국민소득이 기준이 된다. 아울러 요구되는 것은 높은 삶의 질.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소는 개개인의 부, 취업, 환경, 정신적 육체적 건강, 교육, 여가활동, 사회적 소속감, 신앙, 안전, 자유 등. 국민 개개인이 인격체로서 존중받으며 양질의 삶을 살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한국에서 “경제는 선진국, 사회는 중진국, 정치는 후진국”이라는 말이 나돈 지 오래다. 지하차도 물속에서 시민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흙탕물 속에, 흙더미 속에 전 재산을 잃어도 정치인들의 관심은 오로지 권력, 정쟁에 매몰된 모습을 보면 한국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정치 후진국’ 한국은 무늬만 선진국이다. 선진국을 결정하는 진짜 기준은 국민소득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나라, 그래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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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