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그렇지만 기분이 한가한 듯한 일요일 아침. 신문이 아닌 쌓여 있는 구문을 대충 건너뛰며 읽다가 고명하신 이영묵씨의 “죽창가는 이적 행위다"라는 칼럼을 단숨에 읽고 ‘십팔사략’에 나오는 “한 마리 개가 짖으면 백 마리 개가 따라 짖는다" 구절이 생각났다.
칼럼의 제목에 따옴표를 사용했지만 이는 왜자간희(矮者看戱)의 모범이 되는 것 같아 ‘게다’ 짝으로 한방 멋지게 얻어터진 기분이다. 아무리 사유의 인식은 자유라고 하지만 글의 품격이 없는(필자처럼) 게다 짝 소리는 농설(弄說)이 아니면 농설(膿說)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그 농설의 비웃음의 대상이 국민과 국가라면 매국이 될 수도 있겠다. 춘원과 최남선, 을사오적과 칠적이 좋은 본보기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탯줄을 묻은 조국에 대해서는 상식과 역사의 법칙적 인식이 요구된다. 역사의 객관적인 보편성을 부정하고 사사로운 식사 자리에서 자의적으로 국민과 나라의 역사를 싸잡아 왜곡하는 행위는 결코 가볍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친일의 DNA가 몸속에 숨어 있다가 기회가 생기면 왕성하게 퍼지는 암 세포처럼 염량세태의 작태를 보는 듯하다.
과거와 현재의 아픈 역사를 왜곡 하는 몰상식의 시사(時事)는 어불성설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과거사를 왜곡하면 그 나라의 현대사는 절름발이가 되기 십상이다. 시사는 어제도 흘렀고 오늘도 흐르고 내일도 흐르는 민족의 강물이요, 역사의 강물이다. 일본을 환영하면서 내 나라 내 국민을 가볍게 보는 맹신의 근본은 친일이라는 내려 받은 골수가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근거가 부족하다.
김남주 시인이 단숨에 써 갈긴 죽창가에 맺힌 원한의 역사를 구우일모(九牛一毛)만치만 알았다면 죽창가가 이적이 된다는 비린내 풍기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으리라. 죽창가가 이적이 된다면 동학농민 항전도 당연히 이적이 되고도 남는다. 가슴 속에서 천불(天불)이 나지만 동학 농민군을 죽인 일본 놈의 진중 일기를 잠시 읽어 보자.
“나주 성에 도착하니 서남문 가까운 산에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루고 있었다. 붙잡아 고문한 뒤에 죽인 숫자가 매일 12명 이상이 넘었다. 그곳에 시체를 버려 둔 농민군이 680명에 이르렀으며 근방의 악취가 진동했다. 땅에는 죽은 사람들의 기름이 얼어붙어 마치 흰 눈이 쌓인 것 같다."
죽창을 들고 기관총 앞에서 너와 나, 친일의 좀비들 조상이 이렇게 죽었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어간 넋을 위로하는 지노귀굿인 시(詩)가 왜 일본의 두 한국인 밥상머리에서 이적이 되나! ‘동양의 이스라엘’로 불리는 악종 일본 편에 붙어서 동학 농민군의 피로 얼룩진 가슴에 후추 가루를 뿌리며 “덴노(천황)의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해 보라"구? 단군이 일본 시조 ‘아마테라스'의 동생 ‘스사노우'의 아들이라는 왜놈들의 말을 믿는가?
지주(일본)와 마름(한국)의 관계를 한미동맹처럼 공고히 하는 윤석열 정부 등 뒤에서 재잘거리는 참새 타입의 먹물들은 어쩜 다음 정부의 참 매가 하늘 높이 날기만 해도 수서양단(首鼠兩端)의 생쥐들처럼 세상의 눈치를 보리라.
이 씨는 칼럼에서 “죽창 타령 하는 동안 무슨 진전이 있었나? 라고 독자들에게 물었다. 그럼 죽창가를 안 부른다면 무슨 진전은 있는가? 요단강 건너가 만나자의 확실한 진전은 죽음이 되겠지만 죽창가가 무슨 진전을 위한 것인지 나는 모른다. 일본 사람들의 피 80%는 조선인의 피로 밝혀져 친일은 타고난 유전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죽창가가 이적이 된다면 조선의 독립 운동사는 깡그리 이적이 된다. 친일 여우들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좀비 대통령을 앞세워온 뉴라이트를 비롯해 좀비 지식인, 좀비 정치인, 좀비 검새들이 북 치고 장구를 친다.
전 정부가 반 국가세력인 빨갱이가 된다면 빨갱이 반국가 밑에서 검찰총장을 신명나게 해 잡수신 대통령은 빨갱이가 되나 흰둥이가 되나? 날라리를 불면서 일본에 열심히 흔드는 강아지 꼬리 DNA는 백 년을 흔들어도 담비 꼬리가 될 수 없다. 자존심 없는 가상 감정(假象感情)과 “나는 지식인이다"라는 자기 애(愛)에서 벗어나 나라와 국민들의 자존감을 배워 재일교포 중진이라는 분과 이 씨는 자중하고 자중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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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락빌,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