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는 재미 중에 하나가 추억의 재생이다. 리메이크.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작은 숙녀>를 위노나 라이더의 <리틀 위민(Little Women)>으로 다시 보며 딸내미랑 같이 나눌 얘깃거리를 쌓아가는 것이다. 아는 게 좀 있으니 이럴 때 한번 으쓱해볼 수 있지 않는가. 그놈의 영어 땜시 어른이 큰 소리 못 치는 이민가정에서는 그렇다.
90년대에 프리틴을 겨냥한 리메이크 영화 가운데 재미있기로 으뜸은 린제이 로한의 <더 페어런트 트랩>이었다. 이것도 리메이크라는데 오리지널을 본 적이 없으니 내겐 말짱 황. 보는 중간에 못 알아듣는 대사가 있어서 애한테 좀 물어보기라도 할라치면, 쉿 하는 뱀 소리만 듣는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아는 척 보탤 말 보다는 물어볼 말이 더 많으니 아빠의 체면이 영 말이 아니었다.
반면에 <리틀 프린세스(Little Princess)>는 실추된 아빠의 주가를 만회할 수 있던 영화다. 소공녀 아니냐, 소공녀!! 다락방으로 쫓겨간 사라를 내가 어떻게 잊어.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다 시리네. 그러니 할 말도 많지. 같이 비디오 본 뒤 졸려서 자려고 하는 애를 붙잡고 영국과 인도의 식민지 역사에서 시작하여 동인도회사가 뭔지, 묻지도 않는 아편전쟁까지 19세기 유럽과 아시아를 누벼가며 애한테 산교육을 시키려들었다는 말이지.
물 들어올 때 배 띄우라고, 소공녀를 마친 딸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다. 소공자! 소공녀 소공자를 같이 묶은 게 바로 판타스틱 듀오 아닌가. 언젠가 어릴 적 내 별명이 싱겁이가 아니고 세드릭이었다고 말한 적 없었나. 책으로 읽고 텔레비에서 주말의 명화로 보고, 세드릭이 뛰놀던 뉴욕의 뒷골목과 백작 할아버지를 부축해 걷던 영국의 저택은 내가 알던 그 먼 나라의 전부였다.
그런데, 소공자가 영어로 뭐지? 알아야 비디오를 찾든 책을 찾든지 할 게 아냐. 소공녀(A Little Princess) 공식을 대입해 Little Prince? 그건 아니지. 걔는 망또 입고 약간 이상한 거 묻고 다니는 애잖아. 리틀이 아니면 스모올? 타이니? 영? 화초장 장화초 초장화... 흥부 집에서 농짝 빼앗아 지고가는 놀부처럼 아는 영어단어 죄다 동원해 이리 맞추고 저리 돌려봐도 답이 없다.
그 시절 잘 나가던 블록버스터 비디오의 운동장 같던 매장을 헤매고 헤매다가 클래식 코너에서 겨우 그림 맞춰내 재회한 소공자는, 발음도 어려워라, 리틀 로드 폰틀러로이(Little Lord Fauntleroy)! 우리로 치면 파평 윤씨 종갓집 도련님쯤 되려나.
네이버도 없고 구글도 없던 시절의 고생담이다. 겨우 십여년 전인데 마치 세계소년소녀명작동화선집 읽던 아득한 옛일 같다. 요새 구글을 통해 더 알게 된 게 있다면, 소공자-소공녀-비밀의 화원으로 이어지는 프랜시스 버넷(Frances Hodgson Burnett, 1849-1924)의 삼대 베스트셀러 중 선두타자였던 소공자(1886년)의 인기가 백 년 뒤의 해리 포터 못지 않았다는 것. 영국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가세 기울어 외삼촌이 살던 이곳 미국의 켄터키에 이민 온 프랜시스, 유독 아버지 없는 주인공들을 그려낸 배경도 이해할 것 같다.
홀어머니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잡지에 글을 쓰던 버넷은 어머니를 여의고 훗날 의사가 된 남자와 결혼한 후 프랑스에서 잠시 살다가 다시 미국에 돌아와 이곳 워싱턴 디씨에 정착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소설이 소공자다. 성인 애정물도 썼지만 소공자로 아동문학에 뛰어든 버넷은 소공녀(1905), 비밀의 화원(The Secret Garden, 1911)으로 이름을 더 드높였다. 고국인 영국을 자주 오가던 버넷, 그래서 비밀의 화원은 영국에서 나왔는데, 만년은 뉴욕에서 마무리했다. 센트럴 파크의 컨서버터리 가든 안에 그녀의 메모리얼이 세워졌다. 비밀의 화원 두 주인공 소년 소녀의 분수 조각상이다.
뭐 왕년에 소공자 소공녀 한번 안 읽어본 사람 있겠느냐만은 오랜만에 다시 영화로 본 소공자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미키 루니가 아역 시절에 나온 걸로 봤다.
세드릭의 껄렁한 동네 형이자 막판 대역전을 이끄는 조연으로 미키 루니가 연기한 딕의 직업은 구두닦이인데 영어로 슈사인 보이 말고 부트블랙(bootblack)으로도 부른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이렇게 딱새까지는 알았는데 찍새는 뭐라 부르는지 그건 아직 못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