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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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호기심의 발원지

2023-05-11 (목) 신옥식/ 윤동주 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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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 서정주의 자화상을 읽을 때마다 나는 문득‘ 나를 키운 건 8할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었다’라고 되뇌곤한다. 그리고 이내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셨던 박복희 선생님을 떠올린다. 아마 그때 그 일은 내 일생일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학교에 출석하자마자 박복희 선생님께서는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듯이 바로 교무실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는 굉장히 급하고 중요한 서류를 집에 두고 오셨다고 했다. 볼펜으로 도화지에다 열심히 약도를 그려주시면서 그 서류를 갖다 달라고 하셨다. 정황적으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열네 살 시골 아이가 약도 한 장을 들고 혼자서 왜관 읍내를 벗어나는 일은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대구로 가는 시외버스와 시내버스를 번갈아 탔다. 선생님께서 그려주신 약도에 빼곡히 적힌 글씨와 건물들을 확인하면서 봉덕동 골목에 복잡하게 늘어선 집 주소를 찾아 선생님 댁 초인종을 눌렀다. 선생님의 어머니가 반색 하면서 뛰어나오셨다. 그리고는 바로 전화기 다이얼을 돌려 아이가 왔다는 것을 따님에게 알려주셨다. 신기했다.
우리 시골에서는 전화기 옆에 붙은 손잡이를 여러 번 돌려 교환을 부른 다음 전화가 연결되면 동네가 떠나가도록 큰소리로 통화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다가 직통으로 전화를 거는 모습이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그날 선생님의 심부름을 성공적으로 해 드린 후, 나는 몰라보게 정신적 성장을 했다. 나 스스로 믿는 자존감과 성취감은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해내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한 나폴레옹의 말을 실험해 본 느낌이랄까. 봉덕동은 아버지가 캠프헨리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셨을 때,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너무 어려서 기억은 없지만, 나의 성장과정을 아버지께서 틈틈이 말씀해 주셨다. 어머니의 자궁처럼 생각되었던 봉덕동에 선생님께서 사시는 것도 반가웠고 그곳에 혼자 힘으로 다녀왔다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 해 여름방학 때, 봉덕동이라는 지역을 뇌리에서 떨쳐 버릴 수 없어서 박복희 선생님 댁을 다시 방문하였다. 그리고 국사를 가르쳤던 도명자 담임 선생님댁에서도 일주일 동안 놀다 왔다. 시골 동네 아이들이 밤마다 한 방에 빽빽하게 모여서 손바닥만한 텔비레전을 보다가, 넓은 거실 중앙에 놓여있던 큼지막한 TV를 시청하였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TV를 보고 있는 동안 도명자 선생님께서는 내 운동화를 깨끗이 빨아 늘어 햇볕에 하얗게 빛났다.

이제 더는 부모님을 조를 필요가 없어졌다. 심리적 독립이었다. 자신감에 탄력이 붙은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바다를 보기 위해 혼자 왜관역에서 부산역 가는 비둘기호 기차를 탔다. 부산은 일가친척 하나 없는 생면부지의 땅이었다. 부산역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가볼 만한 곳을 물어 해운대에도 가보고 시간이 남아 용두산 공원에도 올랐다. 부산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저 멀리 넓은 바다를 보면서 세계는 참 넓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 수없이 읽었던 책에 나오는 미지의 세계와 시간과 공간은 달라도 내 앞에 펼쳐진 현실 세계가 맞닿아 있는 느낌이었다. 신경조직이 치밀하게 이어져 있듯 사람 사는 세계도 어디든 연결고리 같은 통로가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생긴 역마살이 미디어를 통해 낯선 곳에서의 특별한 경관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가방을 챙기는 습성이 생겼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2023년 1월 13일, 몇몇 회원들과 함께 워싱턴 윤동주 문학회에서 특별 초청 강연을 하신 김종회 교수님(황순원 소나기마을 촌장)을 모시고 Edgar Allen Poe의 묘지를 다녀왔다.

묘역에 도착했을 때, 차갑게 내리던 겨울비는 멈추었다. 그러나 하늘을 묵직하게 덮은 검은 먹구름과 나뭇가지들이 윙윙 우는 세찬 바람 소리가 에드가 포의 음산한 작품과 몹시 닮아 있는 듯 했다. ‘애나벨 리*’를 암송하시는 김종회 교수님의 모습은 마치 주술가가 주문을 외듯 하셨다.
교수님께서는 에드가의 묘지를 찍고 즉석에서‘ 애너벨 리’를 패러디한 디카 시‘전설의 사랑’을 지어 읊어 주셨다. 한강에서 저녁을 먹고 교수님을 아드님 댁에 모셔드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밤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전기장판이 깔린 따뜻한 이불속으로 몸을 밀어 넣고 누웠더니 꿈을 꾸듯 몽롱한 생각들이 신기루처럼 몰려들었다. 지금 여기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나는 몽상가처럼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영화의 스크린처럼 지나고 있었다. 많은 인연 중에 사슴 눈처럼 크고 맑은 눈으로 언제나 생글생글 웃으시던 예쁜 얼굴과 해후했다.

50년 전, 서류를 가져오도록 미션을 주셨던 박복희 선생님이셨다. 졸업생을 대표해서 답사를 하고 학교를 떠나온 후, 선생님의 소식을 전혀 알지 못한다. 운동장에서 중고등학교 전교생을 모아 놓고 졸업식을 하던 그날도 눈물이 고드름이 될 것 같은 매서운 추위였다.
여린 볼을 찢어 놓을 것만 같았던 칼바람이 부는 날씨였음에도 석별의 정을 아쉬워하며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답사를 하고 눈물을 훔치며 단상에서 내려오는 나에게 ‘참 잘했다’며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시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내 기억의 마지막 모습이다. 어렸던 그 아이도 할머니가 되어가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김종회 교수님을 만난 것도, 윤동주문학회와의 인연도, 교과서에서 배우고 그들의 작품을 통해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자손들을 워싱턴에서 만난 것도, 분명 예삿일이 아니다.

<신옥식/ 윤동주 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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