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백한 운명 또는 사명으로 번역하는 매니페스트 데스티니(Manifest Destiny), 이 땅을 차지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도다. 우리가 누구? 유럽계 백인이지.
19세기 중반부터 본격화된 영토 팽창의 캐치 프레이즈다. 출처는 뉴욕의 저널리스트 존 오설리번이 1845년 잡지 데모크래틱 리뷰 7-8월 호에 텍사스 합병을 주장한 글이라고 한다.
멕시코와의 전쟁, 그 결과물인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의 편입, 원주민 몰아내기로 북미 대륙을 독차지하고 제국으로 들어서는 길목의 모토였다. 팽창의 방향은 서부로, 서부로였고 그 연장이 태평양 건너 하와이, 필리핀 식민지화다. 한반도의 운명과도 무관치 않고.
이 모토를 알기쉽게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프러시아 출신의 이민자로 뉴욕 브루클린에서 활동했던 존 개스트의 유화 소품 ‘아메리칸 프로그레스(American Progress)’다. 그림의 주제가 이른바 운명의 데스티니다. 1872년 여행 가이드용으로 주문받아 그린 이 그림은 석판화 기법으로 찍어 인기리에 많이 보급되었다.
그림 오른편에 환하게 그려진 동부 대서양변에서 왼편의 먹구름 가득 덮인 서부 록키산맥을 향해 개척자들이 전진한다. 쫓겨가는 들소떼와 원주민들, 또 곰. 걷고, 말을 타고, 기차와 역마차를 타고 서부로 향하는 백인 정착자들을 여신이 선도한다.
미국을 상징하는 여신 콜럼비아(Columbia)의 이마에는 제국의 별(The Star of the Empire)이 반짝이고 오른손에는 교과서가 들려 있다. 문명의 전파가 진보의 소명이라고. 그런가? 하여튼 직설적이고 다소 유치한 게 꽤나 미국적이다.
내 눈을 사로잡는 건 여신이 왼손에 그러쥔 와이어와 연결된 일련의 나무기둥들이다. 그렇다. 전봇대다. 근대화와 개발과 문명의 상징이랄까. 그런데 한국에선 요새 전봇대를 모르는 애들이 있단다. 전봇대로 이를 쑤시는 게 뭔지 모른다니, 헐. 하기사 어느 설문조사에서 처음 본 영화 리스트에 ‘애수’가 들어있지 않은 걸 보고 내심 충격 먹고 있던 차다. 그러니 혹시 보기는 했더라도 왜 전봇대라 부르는지는 모를 법도 하다.
전봇대가 미국에 처음 세워진 건 1843년, 대서부철도 노선(Great Western Railway)을 따라 전신줄을 깔면서다. 전보, 전신이라 번역된 텔레그래프 시스템은 애초 땅속에 깔려고 했다가 여의치 않아 지상에 전봇대(telegraph pole)을 세우게 됐다.
광화문전신전화국을 기억한다는 게 씁쓸하기만 한데 하여튼 거기서는 약전인 전보 및 전화선을 담당하고 한국전력, 한전이 강전인 전깃줄을 맡았다. 전신줄은 사라지고 전화선, 전력선, 케이블 티비 선, 광섬유 케이블이 다닥다닥 붙어 이제는 다용도의 유틸리티 폴(utility pole)이라고 부른다.
70년대 후반 대학에 들어가서 통합 캠퍼스라는 곳에서 처음 접한 ‘전봇대 없는 풍경’이 기억 난다. 황량하게 넓은 캠퍼스가 영 어색하기만 했는데 한 선배가 그랬다. 잘 봐, 전봇대랑 전깃줄이 없지? 지중화 방식으로 처음 지은 대단지였다나. 지금은 시골에나 가야 전봇대를 볼 수 있나 보다.
미국은 그런 면에서 많이 뒤진다. 내가 살던 애쉬번처럼 교외에 새로 짓는 단지야 다 땅속에 깔아서 하늘이 훤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렇지 않은 곳이 많다. 그렇다고 전봇대 있는 동네가 가난한 동네만은 아니다. 시내 가까운 오래 된 동네는 감히 교체할 엄두를 내지 못해서 그냥 그대로다. 거센 바람에 나무가 쓰러져 전깃줄을 덮치니 정전 사태가 잦은 동네가 바로 부자동네라는 말이 동부에서는 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