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이나 경제를, 특히 경제공부를 한 이들에겐 좀 불편한 진실이 되겠지만, 사실인 걸 숨길 수도 없는 일이니 딱한 일임을 양해를 구한다.
예술가들은 숫자에 약하다고 어느 예술단체의 장(長)께서 연말 결산보고 때 오류 발생에 대한 변명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원래 예술가들은 그런 면에 관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원천적으로 생리에 맞지 아니 하는 것 같다. 또한 뇌 구조도 좀 특이함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그렇기에 한마디로 예술가들은 “숫자에 약하다!”라는 말이 나도는 것 같다.
경제엔 문외한인 필자 생각엔 본래 경제라는 것, 경제학이란 학문도 숫자 하나하나에 얽매이는 학문이라기보다는 인류 복지향상에 조금이나마 기여하도록 빈부격차의 해소, 노동 대가에 대한 합당하고도 공정한 보수(임금) 책정, 노동시간과 건강문제의 사회적, 국가적 책임론 등에 관한 학문이라 생각한다. 대학은 그 본분을 가르치고 배우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1960년대 서울대 총장이셨던 최문환 경제학 박사님의 철학적 훈시가 생각난다.
“제군들, 돈을 벌기위해 상과대학에 진학했다면 당장 학교를 자퇴하고 동대문, 남대문시장에 진출하라!”
대학의 본분의 정곡을 한마디로 정의하셨던 생각이 불현듯 떠오름은 과연 웬일 때문일까. 동반성장, 분배의 정의 등도 경제학의 큰 틀을 말하는 것이리다.
온 세계가 늘 그래왔듯이 오늘날 조국 대한민국에서도 사용자 측과 피사용자 측의 노사갈등 문제와 당국의 조정, 해결능력 부족 아니면, 성의 부족, 문제 심각성 이해부족 등으로 인해 분쟁이 끊임없음을 안다. 요즈음 특히 노동시간 60시간 등 문제가 현안이 되어있는 것 같다.
또한 결과는 늘 약한 쪽, 피사용자 측, 노조측 의사에 반한, 불만족스러우나 그나마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 큰 고통을 감내해야만 될 것을 알기에 불리한 협상이나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결과로 매듭지어지곤 해왔다.
허나 인생이 그 숫자만을 무작정, 끊임없이 쫒는다면 그 끝은 과연 어떠할까. 과연 행복할까. 그 끝은 있기는 있는 걸까?
부유층들의 무분별한 무작정 끊임없는 숫자 사랑과 갈망으로 인해 늘 사회는 폭탄처럼 불안요소가 상존해 왔다. 정부 또한 약자 보호보다는 자본가 보호에 앞장서는 형국이었다.
사실 한 국가의 시동기, 성장기에는 국부 축적을 위해서는 국가기본 산업을 다지기 위한 핵심기업을 국가적으로 집중 지원해야 됨은 마땅하다. 이때 노동자들의 희생이 어느 정도 인정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안정 궤도에 진입한 국가에서는 서서히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로의 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겠다. 이럴 때 노동환경 개선이라든가 복지정책, 모든 참여자(산업가와 노동자들)들의 땀의 결실인 부의 공정한 분배를 사용자 측인 거의 대부분의 기업인들이 스스로 하지 않을 때(아마도 그들은 전혀 이런 일을 자진해서 할리 없을 것이나) 국가가 부득이 나서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때 국가 기능을 제대로 하느냐에 따라 민주적이며 국민을 위한 좋은 정부냐 아니면 그렇지 못한 독재나 불량국가 딱지가 붙느냐 하게 될 것이다.
원조 받는 국가에서 세계 10위 내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했다 과시하면서도 여러 면(특히 정치면에서)에서 아직도 후진성을 탈피 못해 진정한 선진대열에 진입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인접국과 친선을 도모하여 안보와 경제를 공고히 하겠다며 나선 외교무대가 상대국의 치밀하게 계산된 책략에 말려든 형국이 되가는 판에 경제가 좀 나아진들 국민들에게 큰 수치심과 허탈감을 불러일으켰을 때 과연 국민들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역사가 100년 전과 같이 똑같은 형태로 되풀이 되어가는 건 아닌가?
국가의 자존심이 지켜질 때, 국민들도 안정적이며 행복감도 느끼게 될 것이며 경제는 맨 나중임은 국가나 개인이나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정서적 안정감을 조건부로 하고 숫자 인식 면에서 본다면 세상에서 예술가들만큼 행복한 분들이 또 어디 있을까? 숫자 경쟁에 골몰하느라 정작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한번뿐인 인생을 어이없이 마감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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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길 의사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