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의 계절 봄이다. 봄은 만물에 새로움을 입힌다. 이 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四旬節)을 맞이한다. 영적으로 새로워지는 절기인 사순절(Lent)은 봄을 의미하는 앵글로색슨어 ‘lencten'에서 유래하였다. 계절로 보나 교회력(교회력)으로 보나 봄은 온통 새로움이다. 새로움! 살아가며 새로움을 보고, 새로워지는 것처럼 기쁜 일이 있을까?
많은 이들이 새로움을 찾고 새로움에 열광한다. 새 옷, 새 차, 새 제품, 새로운 인물, 새로운 정치, 새로운 이론을 찾는다. 예술가, 시인, 작가, 학자들 모두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새로움을 찾기 위하여 일생을 건다. 기업들은 이윤추구를 위하여 끊임없이 새로움을 찾는다. 오늘날 새로움은 예술계나 비즈니스 업계에서 하나의 가치가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찾는 새로움은 대개, 나오자 곧 옛 것 헌 것이 되어버리는 시간 안에서의 새로움이요, 인위적인 새로움이다. 가짜 새로움도 허다하다. 다른 이의 땀과 창의성을 내 것인 양 표절하여 새 작품으로 발표하는 것, 가짜 새로움이다.
교묘하게 사실과 진실을 왜곡하여 전하는 가짜뉴스 또한 가짜 새로움이다. 인간다움, 제한된 지구생태계를 외면한 채 무한경쟁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부추기는 이름만 새로움(new)을 담은 신(新)자본주의의 모든 주장들 역시 가짜 새로움이다. 새로움에 있어야 할 참, 아름다움, 사랑, 좋음, 열림, 쓸모, 평화, 생명의 풍성함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새로움은 오래가지 못한다.
진정한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예전에 없던 것의 출현이 새로움인가? 가치 위계의 전도(顚倒)가 새로움인가? 아직 새로움에 대하여 충분히 정리된 개념을 만나지 못했다. 아마도 새로움에 대한 정의는 도(道, logos)에 대한 정의 이상으로 어려울 듯하다. 이미 존재하는 것에는 새로움이 없다. 이미 존재하면 그것은 헌것이지 새로움이 아니다. 옷이나 자동차는 나오자마자 이내 곧 헌옷, 헌차가 된다.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전도서1:9)는 솔로몬 왕의 고백은 새로움의 실상을 바로 짚어낸 말이다.
새로움은 동서고금의 지대한 관심사였다. 은나라 탕왕은 세숫대에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이라 새기고 몸을 씻을 때마다 새로움을 추구했다. 논어에‘옛 것을 익히어 새 것을 알면(溫故而知新) 가히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새로움을 안다는 것이 남을 가르칠 수 있느냐 여부를 가리는 시금석이라는 것이다.
무엇이 진정 새로움인가? 예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는 것(거듭나는 것)이라 말씀한다. 새로 남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새로 나려면 묵은 마음, 낡은 생각, 익숙한 사고, 나 중심의 생각이 씻겨 지고 죽어야 한다. 죽지 않으면 새로워질 수 없다. 죽어야 새로워지는,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불가능한 새로움의 역설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날 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말씀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마음이 깨끗해야 하느님을 볼 수 있다. 새로워져야 진정한 새로움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본다. 하느님은 새로움의 근원이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요한묵시록 21:5) 하느님은 곧 새로움이다.
왜 우주가 날마다 새로울까? 왜 봄은 늘 새로울까? 왜 저 하늘은 지루함이 없는가? 영원한 새로움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영원히 새로우신 분이다. 진정한 새로움이란 하느님 곧 하느님의 사랑, 진리,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드러남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새로움은 언제나 좋고 아름답다. 모두에게 기쁨과 유익, 평안과 자유, 생명을 준다.
하늘의 새로움을 체득하고 새로움을 살아내는 삶이 새로운 삶이다. 새로운 삶이란 늘 새로움이신 하느님의 마음 곧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새로운 삶이란 거창하지 않다.
더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삶, 더 존재에 충실한 삶을 의미한다. 새로움의 계절 봄이다. 나오자 곧 헌것이 되는 세상의 거짓 새로움, 가짜 새로움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새로움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일일신 우일신’의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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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석 /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