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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로의식’과 ‘책임의식’

2023-03-07 (화)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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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취재부장 시절 기자들에게 자주 했던 당부가 있다. 동료들보다 기사 하나를 더 쓰겠다는 생각으로 일해 달라는 것이었다. 한 조직에 여러 구성원들이 속해 일하다보면 종종 내가 다른 동료들보다 더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불만이 고개를 들곤 한다. 심할 경우에는 나 빼곤 다 ‘월급도둑’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히기까지 한다. 구성원들이 어떤 일을 얼마만큼 하고 있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관리자이다, 그래서 “내가 조금 더 일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마음가짐으로 취재하고 기사를 써 달라고 당부한 것이다.

인간의 자기중심적 편향에 비춰볼 때 이런 현상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어떤 긍정적 결과에 대한 자신의 기여는 실제이상으로 크게 인식하고 부정적 결과와 관련해서는 다른 이들 혹은 외부 환경에서 원인을 찾으려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모든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성향이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역할과 기여도를 객관적으로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면 백분율로 환산한 그 합은 100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100이 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가정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역할분담에 대한 인식이다.


어떤 부부든 두 사람을 따로 만나 전체 집안일 가운데 당신은 하는 일의 비중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은 후 합산하면 거의 대부분 100을 훌쩍 뛰어 넘는다. 남편과 아내 모두 자신들이 실제 가사분담률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원만한 가정을 유지하는 데 각자가 기여하는 정도를 물을 경우에도 역시 합은 100을 초과한다.

그렇다면 미국사회의 실제 가사분담률은 얼마나 될까. 작가 출신 심리학자인 다르시 록맨이 조사해보니 1980년대와 90년대 남성들의 육아 관련 가사 참여가 늘긴 했지만 여전히 65%는 여성들의 몫이 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록맨은 “집안일을 열심히 하는 근대적 아빠 스토리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문화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빠들의 실제 행동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학생들 다섯이 함께 살고 있는 고층 아파트의 한 주민이 엘리베이터에서 학생들과 마주칠 때마다 쓰레기는 누가 버리느냐고 물었다. 어떤 학생은 “두 번에 한 번은 내가 버린다”고 했고 다른 학생은 “세 번에 한 번은 내 책임”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90%는 내가 버리고 있다”며 볼멘 목소리를 낸 학생도 있었다. 주민이 다섯 학생이 밝힌 쓰레기 수거 분담률을 합해보니 무려 320%에 달했다. 어떤 책에서 읽은 일화이다. 함께 어울려 살거나 일하는 공간에서는 역할에 대한 이런 과대평가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반대로 좋지 못한 결과나 상황에 대한 책임은 실제보다 축소해 인식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능력부족이나 판단실수 같은 자신의 책임은 과소평가하고 외적 요인이나 타인에게 이를 전가하려 한다. 그러다보니 각자가 인식하는 책임의 비율 합산은 100에 훨씬 못 미친다. 이제는 일상어가 돼버린 ‘내로남불’은 바로 균형과 공정성을 상실한 극단적 책임의식의 결여를 꼬집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기여든 책임이든 각자가 인식하는 비율의 합산이 100이 되거나 이에 가까울수록 바람직하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럴 때 가정은 화목해지고 조직의 팀웍은 단단해진다. 대화의 정치, 책임지는 정치도 가능해진다. 작금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은 ‘공로의식’과 ‘책임의식’이 균형을 상실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상과 원인을 진단해도 필요한 변화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성 평등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가사분담의 경우 인식은 크게 개선되고 있지만 지금의 속도로 변화할 경우 남녀 간에 완벽한 분담으로 이어지는 데는 앞으로도 75년이 더 걸릴 것이란 한 비영리기관의 예측은 그리 고무적이지 않다.

사회적 인식을 바꾸고 인간의 성향에 아주 극미한 변화를 주는 일은 이처럼 달팽이 걸음보다도 느리고 지난한 일이다. 그러니 개인 관계를 넘어 사회적 정치적 갈등과 증오의 원천이 되고 있는 ‘내로남불’ 의식이 사라지길 기대하는 건 어쩌면 부질없는 희망일지도 모른다. <논설위원>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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