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파이어 FIRE’

2023-02-06 (월) 김미혜(한울 한국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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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를 하는 남편과 매일 7km 정도 걷는 일이 하루의 일과다. 걷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매일 운동을 할 정도로 열성이 있지는 않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걷는 남편은 내가 억지로라도 따라나서도록 밀어주고, 다양한 소재로 나누는 이야기들이 끌어주기에 가능하다. 남편이 한참 ‘파이어족’ 이야기를 하던 때가 있었다. ‘파이어(FIRE)’는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약자로 경제적 자립을 토대로 조기 은퇴를 추진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1992년도에 등장한 말이지만 최근 한국과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유행하는 신조어다. 소비문화나 타인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돈과 시간에 자유로워지자는 운동이다. 이들은 ‘시간’을 쓰기 위해 ‘은퇴’를 결심하는 사람들이다.

몇 년 전, 남편이 ‘6개월만 쉬어도 될까?’ 물었던 적이 있다. 실제로 사표를 쓰지는 못했지만 쉬고 싶을 정도로 ‘번아웃burn out’되었던 시기였다. 남편이 휴직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게 뻔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몰아세울 수 없었다. 얼마 전에는 책 ‘40대에 은퇴하다’의 이야기를 걷는 내내 생생히 들려준다. 13년간 기자로 일하면서 늘 시간에 쫓기던 저자가 어느 날 사표를 쓰고 좋은 남편으로 자상한 아빠로 거듭났다는 용감한 도전 이야기였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종횡무진 현장을 누비던 기자의 삶에서 평범한 아저씨가 된 일상도 살아볼 만하다는 이야기가 신선했다고 한다.

한국 은퇴 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의 실질 은퇴 나이는 남성 72.9세, 여성 70.6세로 OECD 중 가장 높다. 중요한 것은 은퇴의 시기가 아니라 얼마나 준비된 은퇴를 하느냐이고 은퇴 후의 삶이다.
최근 실리콘밸리에 해고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남편의 회사도 6%의 직원이 해고됐다. 예고된 일이었다고 해도 충격은 크다. 남편은 회사에서 해고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가장으로서 심리적 압박을 받지 않을 수 없을 테고 그런 마음이 꿈으로도 나타났다고 생각하니 비록 꿈일지라도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김민식 PD의 책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에서는 저자가 회사에서 징계 발령을 받고 한 달간 아르헨티나로 여행을 떠난 이야기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인생에서 큰 위기로 느껴지는 순간에 여행을 떠나서 자기 삶을 돌아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도 남편에게 여행을 다녀오라고 할 수 있을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때로는 인생 리뷰와 프리뷰 시간이 되는 것 같다. 내 신발을 벗어 놓고 잠시 타인의 신발을 신고 다른 세상을 만난다.

<김미혜(한울 한국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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