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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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반도체와 오셀로의 ‘비극 손수건’

2023-02-03 (금) 서정명 서울경제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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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능력이 탁월했던 베네치아의 장군 오셀로는 기수(旗手) 이아고의 모략과 얄팍한 술수에 빠지고 만다. 부관 자리를 경쟁자인 캐시오에게 빼앗긴 이아고는 아름답고 정숙한 오셀로의 아내 데스데모나와 캐시오가 불륜에 빠졌다는 거짓말을 사실인 양 덧칠해 오셀로의 눈과 귀를 가린다.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에게 선물한 ‘손수건’이 캐시오의 방에 떨어져있는 장면을 교묘하게 연출해 오셀로가 이들의 관계를 더 의심하도록 부추긴다.

결국 질투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은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를 침대 위에서 목 졸라 죽인다. 아내를 살해한 뒤 모든 진실이 하나둘씩 백일하에 드러나고 데스데모나의 결백이 증명되자 오셀로는 죄책감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현실과 진실을 외면한 채 거짓 정보와 오해로 아내를 교살한 오셀로의 어리석음과 아둔함을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꼬집고 있다.

한국 수출의 20%를 담당하는 반도체 산업이 풍전등화 신세다. 지난달 반도체 수출은 60억 달러로 전년 1월(108억 달러)에 비해 45%나 고꾸라졌다. 우리 경제의 대들보인 반도체가 밑동부터 흔들리면서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새해 첫 달 무역적자는 127억 달러로 월간 기준 역대 최대를 나타냈다. 11개월 연속 적자 행진이다. 세계 최고의 기술과 경쟁력을 자랑하는 메모리반도체가 수요 둔화에 따른 가격 하락과 재고 증가라는 ‘이중고’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초미지급(焦眉之急)이다. 지난해 4분기 삼성전자 반도체부문(DS)의 영업이익은 2,700억 원으로 전년 동기(8조 8400억 원)보다 97%나 급감했다. 메모리와 달리 시황 변동이 작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분야의 글로벌 1위인 대만 TSMC가 13조 원가량의 영업이익을 달성한 것과 비교하면 5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SK그룹의 캐시카우(현금 창출원)인 SK하이닉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4분기 1조 7,000억 원의 영업 손실을 기록했는데 SK하이닉스가 분기 단위 적자를 낸 것은 2012년 3분기 이후 10년 만이다. D램·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수요 절벽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올해 상반기 영업적자가 4조 원에 달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도 나온다.

세계는 지금 ‘반도체 전쟁(Semiconductor War)’ 상태다. 미국 의회는 ‘명가(名家) 재건’을 외치며 자국 반도체 산업에 520억 달러를 지원하고 25%의 세액공제를 적용하는 반도체지원법을 속전속결로 통과시켰다. 이에 뒤질세라 유럽연합(EU)은 430억 유로를 투자하는 EU 반도체법에 합의했고 중국은 반도체 분야의 법인소득세를 50~100% 감면해주고 있다. 일본도 반도체 설비투자의 40% 이상을 보조금 형태로 지급하고 있고 대만 입법원(국회)은 이달 초 반도체 연구개발(R&D) 비용 25%를 세액 공제하는 산업혁신조례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경쟁국은 ‘반도체가 국부이고 안보’라는 위기의식을 갖고 정부와 여야 국회가 내남없이 의기투합하는 모양새다.

바깥세상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한국은 딴 세상이다. 반도체 시설투자에 최대 25%까지 세액공제를 확대하는 K칩스법은 국회에서 뿌연 먼지만 쌓이고 있다. ‘대기업 세제 지원은 특혜’라는 곰팡내 나는 ‘동굴의 우상’에서 여태까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미국·EU·대만·중국 등 경쟁국은 기업 지원을 통한 국부 창출에 사활을 걸고 있는데 우리는 케케묵은 기업색깔론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오셀로의 손수건은 오해와 곡해를 불러와 결국 비극을 초래했다. 반도체와 기업을 바라보는 편향되고 비뚤어진 시각을 교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경제는 ‘오셀로의 비극’을 읊조리는 장탄가를 부르게 것이다.

<서정명 서울경제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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