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한량없이 깊은 언어입니다. 가는 자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네.’
출처가 불분명한 이 짧은 문장이 말많고 혼란한 시절을 살아나가는 데 다소의 힐링(치유;治癒)이 된다. 근자에 규모와 성격이 다르지만 필자와 관련있는 미국의 2개 단체에서 좀 떠들석한 일이 생겨서 그 리더의 신상에 문제가 생겼다. 단체의 성격과 규모에 관계없이 사회일반의 규범적 토대는 헌법(憲法)이다.
대한민국 헌법 1조는 1항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사실 2항까지도 필요 없다. 2항은 제 1항에 대한 설명이다. 권한과 책임, 권한과 의무는 글자만 다를 뿐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공화정’의 핵심이다. 자고(自古)로 백성들은 피땀흘려 일하고 국법에 의해서 정해진 세금을 자신은 굶더라도 내야하고 내야했다.
법으로 정해져서 반드시 내야 할 의무도 있지만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받기 위해서도 그런다. 조직과 단체도 유사하다.
세금(회비)을 낸 국민으로부터 그 권한을 잠시 ‘위임(委任)’받아 성실하게 직분을 행하는 것이 공화정이다. 왕정에서는 행정, 입법, 사법 모든것의 중심은 왕(王)이다. 그런데 공화정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그렇게 보인다거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적어도 100년전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고 봐도 좋다. 왕정(王政)과 공화정의 근본적이 차이가 바로 이 점이다.
그런데 말이 쉽지 그게 잘 이루어질 리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법(法)과 규정(規定)이다. 변화 많은 세상에 그 수많은 경우를 모두 다 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소통과 절차상의 번거로움을 피하고 효율을 강조하면서 그 짧은 법으로만 모든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신의칙(信義則), 즉 ‘신의성실의 원칙’은 공동생활의 일원으로 상대방의 신뢰에 반하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법률적 용어다. 법과 도덕의 조화를 꾀하려고 만든 원칙이다. 이를 상위자가 어길 때는 권한남용에 대한 처분이 뒤따른다.
두 단체 공히 사건의 본질보다는 ‘소통(疎通)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건의문화(建議文化)의 미성숙과 리더의 이해부족이 순식간에 건의가 불평(不評)이나 불경(不敬)으로 내처져 버렸다.
한국 사회에서는 건의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상당기간 문제의 본질이 잠복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어렵게 꺼낸 건의에 대한 가납(嘉納)과 묵살(默殺) 사이에 수많은 반응과 소통이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이 바로 리더쉽이다. 건의가 불평으로 뒤틀려 버리는 순간 소통과 협의는 사라져버리고 명령과 지시, 복종등 직위와 권위만 남는다. 공화정이 왕정으로 되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또한 정책과 사업에는 당위(當爲)와 공감(共感)의 문제가 있다. 영어로 치자면 should 와 empathy, agree로 보면 맞다. 당위는 명쾌해 보이지만 타이밍 또는 상황과 마주쳐야 한다. 공감만을 강조하면 한발짝도 전진을 못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여기에 반대의견을 적(敵)으로 규정해 버리면 접착제 역할인 설득(說得: persuade)이 설 자리가 없어져 버린다. 개인간이나 단체, 조직이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관계 및 연관자들이 모든 걸 내려 놓고 자연인으로 되돌아 가면 ‘남는 자들의 몫’이겠지만 그렇다고 책임과 비굴(卑屈: meanness)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박경리 소설 ‘토지’에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질곡의 한국 근대사를 관통해야 했던 주인공 서희에게 주변의 배신과 협잡은 몸에 붙어 다녔다. 살아 남아야 겠다는 집념 앞에서는 비굴도 사치였다. 끝까지 살아 남아야 할 사명(使命)이 토지를 버리고 그녀를 북간도로 향하게 했다.
2023년은 제헌절 75주년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제 헌법 제1조 1항은 적어도 생활주변에서는 잊어도 될때가 되지 않았나? 멤버를 하늘처럼 받들라는 게 헌법 1조다. 그걸 모르면 아무리 작은 단체라도 맡지를 말일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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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구 / 위싱턴 평통회장,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