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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이 왜 이러나

2023-01-13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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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주 연방하원에서는 100년 만에 볼까 말까한 기이한 드라마가 펼쳐졌다. 하원의장 선출하느라 의원들이 무려 15번이나 투표를 한 것이다. 하원의장은 대통령, 부통령 다음가는 권력 서열 3위의 막강한 자리이지만 선출 과정은 간단하다. 하원 민주 공화 진영은 새 회기 시작 전 각기 회합을 갖고 원내대표를 뽑는다. 그리고 회기 첫날 이들을 후보로 하원의장을 선출한다. 의원들이 자당 후보에게 표를 던질 것은 불문가지. 다수당 원내대표가 하원의장이 되는 것은 관행이다.

그 오랜 전통이 이번에 틀어졌다. 하원의장 선출에 재투표가 동원된 것은 미국 역사를 통틀어 14번. 그중 13번은 남북전쟁 이전의 일이다. 최다투표 기록을 세운 것은 1855년 34대 의회.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과 반이민 정서 확산으로 분열상이 극에 달했다. 20여명 후보가 난립해 2달 동안 133차례 투표 끝에 의장이 선출되었다. 이후 마지막으로 재투표 혼란이 일어난 것은 1923년. 그리고 꼭 100년 만인 지난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118대 의회가 시작된 지난 3일 케빈 매카시 공화당 원내대표는 하원의장이 될 만반의 준비를 갖춘 듯했다. 주말에 짐을 일부 의장실에 옮겨놓았을 정도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터지면서 그는 나흘 밤낮을 가슴 졸이고, 온갖 치욕적 타협 끝에 7일 새벽 가까스로 의장이 되었다. 2006년 연방하원 입성 후 9선을 거치며 꿈꿔온 의장자리를 그는 드디어 차지했다.


하지만 그것을 승리라고 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의사봉을 거머쥐겠다는 일념에 그는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 어깃장 놓는 강경극우파를 달래느라 의장의 권한을 덜어내고 또 덜어냈다. 셰익스피어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서 빚을 못 갚으면 살 1파운드를 내어주기로 한 대목이 떠오를 정도였다. 그런 수모 끝에 그가 메달을 따고 경기가 종료되었다면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경기는 이제 시작이니 문제이다. 의장이 힘을 못 쓰면서 하원이 마비되면 그의 정치생명만 타격을 입는 것이 아니다. 정부지출안이나 주요 법안이 제때 통과되지 못하면서 국가와 국민이 볼모로 잡힐 수 있다.

공화당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전통적 가치와 안정을 중시하는 품격 있는 공화당 의원들은 어디로 밀려난 걸까. 일단은 공화당이 다수당이기는 하지만 의석이 많지 않은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하원 435석 중 최근 한 의원이 사망, 현재 공화당이 222석 민주당이 212석을 차지하고 있다. 의장선출에 필요한 과반(218)의 표를 얻으려면 공화당 의원들이 똘똘 뭉쳐야 하는 데 자중지란이 터졌다. 하원 극우파의 모임인 프리덤 코커스 소속 20명이 완강하게 매카시를 반대하고 나섰다. 20명 - 뭔가를 되게는 못해도 안 되게는 할 수 있는 숫자이다. 매카시는 이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전전긍긍했다.

그렇게 그가 스스로 도려낸 살, 즉 권한은 우선 의장 불신임 규정완화. 하원의원 누구든 언제든 의장이 마음에 안 들면 혼자서도 의장 해임결의안을 제출할 수 있게 했다. 다음은 하원 운영위에 프리덤 코커스 의원 다수 배치. 본회의 상정 법안 토론 및 투표 규칙을 정하는 대단히 막강한 위원회이다. 여기서 막히면 어떤 법안도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한다. 그외 다방면으로 의장 권한을 제한하고 이들의 영향력을 확대할 약속들을 했고, 그에 기초한 운영규칙개정안이 지난 9일 하원을 통과했다. 팔다리 다 묶인 그가 어떻게 하원을 이끌어갈지, 의회가, 국정이 어떤 마비상태에 빠질 지 우려가 크다.

극우세력이 의회 공화당 내에 똬리를 튼 지는 오래 되었다. 90년대 중반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 시절부터이다. 2015년 프리덤 코커스를 결성하고 이를 구심점으로 세를 다져온 극우진영은 역대 공화당 지도부에 목안의 가시였다. 이들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2015년 존 베이너 당시 하원의장이 사임했고, 후임 폴 라이언 의장 역시 기회를 보다가 의원직 자체에서 물러났다. 사임 후 쓴 회고록에서 베이너는 프리덤 코커스의 핵심인사를 ‘정치적 테러리스트’라고 평했다. 이어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거리낌 없이 증오와 분열의 정치를 펼치면서 이들 역시 더욱 극단으로 치달았다.

트럼프의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세력과 프리덤 코커스는 본질에 있어서 같다. 이민자, 유색인종이 미국을 차지하지 않도록 기독교 백인들이 뭉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것이 핵심 메시지이다. 이를 위해, 이민을 장려하고 유색인종의 평등권을 옹호하는 민주당과 공화당 온건파 등 기성정치인들을 모두 갈아치워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백인 근로계층의 좌절감과 분노를 연료삼았던 트럼프의 전술을 이들은 모범답안으로 삼고 있다.

이번 난항에는 매카시의 책임도 없지 않다. 그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는 아니다.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은 기금모금. 엄청난 돈을 모아 공화당 후보들을 지원하고 전국의 유세장을 찾으며 격려한다. 덕분에 사람들이 주변에 모이고 적들이 무장해제하는 것이 그의 강점이다. 하지만 누구나에게 잘 하려다 보니 일관성 없다, 원칙과 쉽게 타협 한다 등의 비판이 따른다. 트럼프에 너무 충성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연방의회에 대한 대중적 믿음은 지금 바닥이다. 의회를 ‘대단히 많이’ 신뢰한다는 유권자는 2%에 불과, 지난 50년래 최하위라고 갤럽은 밝힌다. 바닥을 친 신뢰도가 지하로 내려가는 건 아닐지 불안하다. 공화당 당내 갈등으로 국민들의 삶이 인질로 잡히지 않기만을 바란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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