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안드레이와 나타샤 외에도 무려 550명이나 되는 주인공들의 운명이 섬세하게 묘사된 대하소설이다. 218년 전의 역사적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을 읽다보면 전쟁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민중의 열정이 조국의 위기를 어떻게 바꿔나가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 혹독한 겨울철에 죽음과 굶주림이 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장이 떠오른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끝이 안 보인다. 예나 이제나 전쟁은 패자만이 아니라 승자도 관전자도, 나아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북한의 무인기가 서울을 휘젓고 간 뒤로 한반도가 뒤숭숭하다. 가뜩이나 물가와 고용의 불안으로 민심이 흉흉한 판에 북한이 무인기 도발을 감행한데 이어 북한은 앞으로 핵탄두 보유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겠다고 공언함으로서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했다. 그러자 무인기 대응에 실패한 윤석열 정부가 ‘전쟁 준비 운운’하며 강경발언을 일삼아 오히려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진정한 안보는 지도자의 확고한 국가관과 신뢰성 있는 리더십 그리고 국민의 단합된 힘 위에서만이 지켜지기 마련이다. 1% 미만의 차이라도 승자는 승자였으며 엄청난 권력이 삽시간에 그리로 쏠려 들어갔다. 이때 승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만 아니면 겸손이다. 승자는 한없이 겸손하고 폭넓은 아량을 베풀 줄 알아야한다. 그것이 참으로 승자를 승자답게 만드는 길이다.
그러나 만일 승자가 오만의 이빨만 번뜩인다면 그것은 아프리카의 정글세계와 다를 바가 없다. 지난 연말 주로 자기 진영 인사들만을 골라내 유례없는 대규모 사면을 한 일이나 자기 가족 수사만은 철저하게 막는 것은 국민 통합도, 정의와 공정도 아닌 것쯤은 시중의 장삼이사(張三李四) 모두가 다 안다.
언론과 노조를 공격하고 사회적 약자와 참사 피해자를 외면했더니 지지율이 올랐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내년에 있을 총선거에 다수당이 될 수 있다고? 어림없는 일이다. 반대편과 마주 앉아 협치하며 갈등을 풀어가야 한다. 싫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사는 길이다. ‘전쟁과 평화’에서 보듯이 전쟁의 대척점에 반드시 평화라는 거대 담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과 우정, 화해와 용서 같은 소박한 언어들이 가득하다.
미국이 다른 지점에 눈을 돌리고 있는 사이 전범 일본은 재무장에 속도를 내고 있으며 남과 북의 당국자들이 다투어 긴장을 조성함으로써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어른거리고 있다. 그러나 가장 위급할 때 길은 보인다. 시민들이 앞장서야 한다. 시민들이 전쟁 반대를 강력히 주장하며 민족 스스로 북핵문제 해결의 입구를 찾아내지 않으면 위기는 깊어진다.
새해 들어 미주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사상으로 돌아가자는 동포적 결집이 이루어지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이 땅에 뿌리내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으로 한반도를 지키자는 움직임이 태동되고 있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한 일로 평가받고 있다.
다시 화해의 시대를 그리며, 성 프란시스코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꺼낸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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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