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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23-01-02 (월) 조민현 팰팍 성 미카엘 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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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시작했던 그 첫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 어리고 순수했을 때 가졌던 그 마음을 나이를 먹어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간직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누가 하느님의 사제가 된다는 거룩한 뜻을 세우면서 뭐 다른 욕심이 있었겠는가? 내가 사제가 되어 하느님 앞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모든 것을 바치고 신자들을 위해 살아간다고 뜻을 세우지 않았겠는가? 서울신학교 교가가 티끌 같은 세상 진세를 버렸노라 내 몸마저 버렸노라 이름도 버리고 뭐도 버리고 다 버리고 주님만을 따르겠다고 했다. 어린 신학생시절 나는 버린다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 뜻도 모르고 신나게 불렀다.

아무도 처음부터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 자리욕심, 남들보다 잘나고 싶은 명예심, 돈 욕심에 돈을 착복하고 자기 뱃속을 차린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동료를 시기 질투하고 뒤에서 험담하고 공격하고 나만 맞고 나만 잘났다는 교만한 마음도 없었다.

처음에 우리는 다 순수했다. 나도 그랬다. 처음에 사제로 서품된 지 몇 해도 안 된 초짜 신부로 엠이(ME) 주말을 들어갔다. 주말 중 발표부부들이 재무상태가 안 좋다며 여기저기 지출할 경비가 모자란다고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좀 지나서 나에게 수고비로 사례금이 든 봉투를 건네준다. 나는 돈이 모자란다면서요 하고 돈 봉투를 거절했는데 계속 받으라고 종용하는 그 부부에게 결국은 화를 낸 기억이 있다. 돈이 모자란다면서 왜 나에게 돈을 주냐고. 안 받겠다는데도 왜 자꾸만 주냐고 화를 낸 것이다.


그런데 많은 시간이 지나 그 옛날의 순수하고 착한 신부는 어디로 갔는지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내 스스로도 참 기가 막힌다. 왜 준다는 돈도 싫다고 했냐 말이다. 처음의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은 다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잔머리를 굴리면서 주판알을 튕기며 뭐가 이익이고 뭐가 손해인지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살아온 해가 많아질수록 더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한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생전 나에게 보내주신 책이 있다. 법정스님의 ‘맑고 향기롭게’라는 책이다. 천주교신부에게 스님의 책을 보내주시는 아버지 얄궂음에 그 책을 볼 때마다 혼자서 빙긋이 웃어본다. 내 사제직이 맑고 향기롭고 축복 속에 은총으로 피어날 것인가 아니면 욕심과 교만, 더러움으로 썩은 냄새가 가득찰 것인가 바로 그것이 문제로다. 처음처럼, 처음으로 되돌아가자.

<조민현 팰팍 성 미카엘 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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